top of page

처음 겪는 날
마디 | @PlowingLife
겨울의 아침이 느릿느릿 밝아왔다. 일출은 아파트 단지의 새들보다도 게을렀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다. 그 대신 하늘은 아주 맑고 푸르렀다. 해가 늦게 뜬 걸 보상이라도 하듯이.
유단은 익숙하게 이불을 정리하고 아침밥을 간단히 차렸다. 사실 정오까지는 그 어떤 음식도 먹고 싶지 않았다. 어제 새벽에 집으로 돌아와서 늦게 잠들었으므로 더 자고 싶은 생각도 간절했다.하지만 오늘 해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아예 거르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어제 이모가 생일상을 너무 푸짐하게 차려주셔서 그는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야 했다. 양만 문제인 게 아니었다. 생일날 가족끼리 식사를 못 한다는 아쉬움을 요리로 풀어낸 것처럼, 하나같이 아주 전투적인 열량을 자랑하는 메뉴였다.
돌이켜 보면, 일주일 전에야 연락해서 「내가 좀 바쁠 예정이라. 28일 말고 27일에 밥 먹자.」 그렇게 통보한 건 조금 무신경했다는 생각도 든다. 가뜩이나 작년에는 유단이 일시적이지만 아주 제대로 ‘절연’을 해버리는 바람에, 모두가 생일을 까먹고 못 챙겨준 일이 있었지 않은가. 다들 유단에게 미안해서 어떡하냐고 했었는데.
그래도 생전 처음으로 친구들과 생일 파티를 할 거라고 이야기하니까 미아와 수현뿐만 아니라 이모랑 이모부도 이해해 줬다. 오히려 무척 기뻐하며 응원을 해주기까지 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라나 뭐라나. 가끔은 유단을 8살 아이처럼 보는 것 같을 때가 있는 건 왜일까?
좌우지간 18살의 삶에서, 최근 한 달 동안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바로 유단의 신분이다. 고등학교 2학년으로서 치러야 할 시험―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 지긋지긋한 삼 형제―는 모두 끝났다. 더군다나 지금은 방학이다.
똑같은 고등학생이고 단지 학년만 바뀐 게 아니냐. 방학이면 많이 잘 수 있고 편하겠다. 그런 안이한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이 나라의 입시지옥을 과하게 무시하는 행위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예비 고삼.’
그들은 몹시 특수한 신분이다. 학교 전산 시스템 상으로는 2학년인데다가, 겨울방학이 끝나면 봄방학 전까지 다시 똑같은 교실을 쓸 것이고, 아직 12월이라서 한국식 나이가 바뀐 것도 아닌 판국에, 예비라는 구질구질한 단어를 붙이면서까지 이 사회는 취급을 달리한다. 어른들이 보기에 그들은 인권보다 공부를 우선시해야 하는 존재들이요, 수능 전까지는 그 어떤 자유도 허락되지 않는다.
저기 보라. 요괴들의 잔소리를 들을 때가 아니면 입시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는 유단마저 밥을 다 먹은 뒤 참고서 표지를 힐끗 쳐다보지 않는가. 지난주에 식탁에 올려두고 까먹은 것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심각한 모습을 보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물론 인간이라는 종족은 자유와 행복을 무척 사랑하고, 쥐어짜면 짤수록 경이로운 힘을 보여주므로,
「얘가, 뭘 모르는 소리를 하네. 원래 바쁠수록 더 많이 노는 거야. 고등학교 3학년이야말로 가장 신나게 놀 수 있다고. 얌전하던 애들까지도 결국 광기에 빠지거든.」
「그런데 누나는 너무 많이 놀지 않았어?」
「시끄러워.」
어젯밤에 들은 미아의 말처럼 한층 더 재밌는 한 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유단은 시선을 살짝 들어서 책상 위에 올려둔 달력을 쳐다보았다. 오늘 날짜에 크게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 모습이 낯설었다.
아마 작년까지는 달력에 동그라미 같은 것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꼭 기억해야 하는 일이라면 용건을 글씨로 적어두는 일이 다였고, 그마저도 종이 달력보다는 휴대전화에 적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괴이를 잊게 되는 인간의 생존본능처럼, 유단의 무의식 역시 환상열차와 관련된 모든 것을 축소하고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래. 이미 많은 게 바뀌었다.
학년 같은 사소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는 나갈 준비를 했다.
*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그렇게 인사하고 가게를 나서자, 바깥 공기가 무척 차가웠다. 목도리에 채 가려지지 않은 귀의 위쪽, 또는 손가락 같은 몸의 끄트머리가 시렸다. 아침에는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 지금은 칼바람이 부는 탓도 있을 것이다.
장갑을 안 들고 온 게 꽤 큰 문제였다. 평소라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되지만, 케이크를 들고 전통의 거리까지 가야 하는데.
유단은 집에 들렀다 가느니 버스 정류장까지 더 빨리 걷기로 결심했다. 그러면서도 팔을 흔들지 않으려고 계속 의식했다. 요즘은 습관이 돼서 긴장하지 않아도 잘 운반할 수 있었지만, 이게 과연 흔들려도 멀쩡할지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그는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팔에 무게가 느껴질수록 뿌듯함보다는 찝찝한 마음이 커졌다. 아무리 의미 있는 날이라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못난 케이크보다는 그냥 가게 주인이 만든 케이크를 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중요한 날이니까 오히려 아름다운 모양새를 보고 기분 좋아지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아저씨에게 너무 큰 도움을 받았다. 몇 시간이나 헤매는 그를 쫓아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손님의 계산을 하면서도 유단이 망치지 않게 적절하게 제지했고―뒤통수에 CCTV가 있는 게 분명하다―, 빨간색 리본으로 평소보다 더 화려하게 케이크 상자를 묶어주기까지 했다.
돌아가서 이걸 버리고 새 케이크를 사 가겠다고 이야기하면 평생 가게 출입 금지령이 내려질지도 모른다.
물론 싱싱하고 당도 높은 과일로 장식했고, 생크림은 아저씨가 만들어줬기 때문에 기본적인 맛은 보장되어 있다. 그 요괴들이 먹을 때마다 감탄하는 맛이니까.
그런데 시트가 괜찮은 식감일지 영 불안했고 과일 장식도 조잡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이 주 동안 집에서 잠들기 전에 인터넷에서 케이크와 관련된 영상이나 글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그걸로는 역부족이었다.
추워서 버스에서 내린 뒤에도 열심히 걸었더니 금방 도착하기는 했다. 유단은 긴장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오는 길에 많이 춥진 않으셨어요?”
“왔으면 손 씻고 빨리 수저 좀 놓아라!”
“아니다, 내가 할게! 손이 꽁꽁 얼었을 테고. 오늘은 대접을 받아야지.”
“유단이가 오는 길에 또 괴이에게 붙잡혔나 봐.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다들 살펴봐야 해.”
“제가 보기에는 평소보다 건강해 보입니다만.”
반월당 식구들이 시끌벅적하게 그를 맞이해 줬다. 평소라면 조금 더 느긋하게 얼굴을 비췄을 백란도 일 층에 내려와 있었다. 유단을 기다린 것 같았다.
요괴들의 말을 들어보니, 대부님이라고 불리는 그 개구리 정승은 저녁에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유단이 오기 전에 미리 들러서 선물을 두고 갔다.
그리고 북촌과 서촌에서 나름대로 자제해서 보낸 선물들이 한 구석에 있었는데… 개수를 보니까 도깨비들의 절제력을 믿어도 되는지 의심이 들었다. 애초에 그의 생일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부터 문제였다. 전생은 개인정보에 포함되지 않아도, 생일은 포함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 그리고 우리의 단골손님들은 조금 늦는다는구나. 먼저 식사를 하고 있으라던데.”
“왜? 요괴왕 아저씨가 나 같은 괘씸한 인간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는 걸 막고 있기라도 한 거야?”
“그건 아니야. 깜짝 이벤트를 해야 하는데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전해달래.”
“나를 놀라게 할 거라고 미리 얘기하면 도대체 그게 무슨 서프라이즈지?”
“괜한 수고들을 하는군요. 가게가 또다시 새로운 방식으로 가둬버리면 그게 바로 깜짝 놀랄 거리인데 말입니다.”
“요즘은 안 갇힌 지 꽤 됐거든?”
그는 어이가 없었다. 하여튼 이 가게는 조용할 날이 없고, 우아한 모습이나 체통 또한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만약 그들이 품위 있어 보인다면 필요할 때만 급하게 발휘하는 가식일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평화롭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 참 좋았다.
유단은 겨우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자, 선물이야.”
그리고 들고 있던 케이크를 앞으로 척 내밀었다.
“다들 반응이 왜 그래?”
인간 빼고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생일인 사람이 케이크를 직접 들고 온 것도 매우 이상한데, 다른 요괴들에게 선물이라고 내밀다니. 서로 몰래 시선을 주고받으려는 듯했지만 유단에게는 전부 보였다.
“왜 굳이 내 입으로 오늘 저녁에 생일을 챙겨달라고 했을 것 같아? 아니, 내가 그렇게 뻔뻔한 성격이라고 생각해?”
다들 난처해하며 좀처럼 말이 없었다. 희귀한 광경이었다. 백란이 그들을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저희 말고는 달리 친구가 없어서, 그런 안쓰러운 이유가 아니었습니까?”
“그래. 나 친구 없다. 근데 그래서 그런 게 아니야. 파티는 그냥 구실이고, 나 말고도 다 같이 축하 받는 자리를 가지고 싶었어.”
유단은 긴장돼서 눈을 감아버렸다.
“오늘은 팔목귀가 없어진 다음에 맞는, 내 첫 번째 생일이잖아. 다들 목숨을 걸면서까지 같이 싸워준 덕분에 내가 살아있는 거니까. 남은 인생에서 제일 특별한 날이 아닐까 하고. 그래서, 그러니까, 아 정말,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아무리 어렸을 때 겪은 이별이라서 애통한 마음이 크지 않다고 해도, 쓸쓸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대로 열심히 살아왔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자신의 생일과 가족의 기일이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있는 삶에서, 이모의 얼굴을 볼 때마다 엄마와 닮은 부분이 자꾸 눈에 담기듯이.
이를테면, 돌아가신 엄마는 유단이 무슨 진로를 택하든지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한다. 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으니까. 그런 차가운 사실들이 가끔씩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렇지만 그 뒤로 살아온 일 년은 유단이 그런 생각을 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참 다채롭게도 바빴다. 본인 가게에 갇힌다거나, 자꾸만 순서도 안 지키고 깨어나는 옛날 존재들 때문에 가방 재빠르게 여닫기 기술을 배워야 한다거나, 그런 창피하고 우스운 일들.
그렇게 고생했던 모든 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추억으로 남았다.
그래서 생일날에 수현이 데리러 와야만 집 밖으로 겨우 ‘꺼내지던’ 과거와는 다르게, 제 발로 나와서 다른 인요들과 어울릴 여유도 생겼다. 이건 정말로, 그럭저럭 인간 구실을 하며 살아가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말 고마워. 그냥 이 말이 하고 싶었어. 아무리 많은 인간을 구해줘도, 결국에는 다들 잊어버릴 수밖에 없잖아. 그렇지만 나는 평생 기억할 거야.”
혼자 뛰어들게 놔두지 않는 고집 센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죽을 만큼 괴로웠던 일도, 함께 행복했던 일도 전부 놓치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슬며시 눈을 떠보자 모두 감동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백란은 금세 침착한 얼굴로 돌아갔지만, 유단은 분명 보았다.
“새삼스럽게 쑥스러운 소리를….”
흑요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다들 과거를 돌아보고 있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인간이 처음 이 가게를 찾아온 날로부터 꼬박 이 년이 될 것이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분하게 그 흐름을 끊어 현재로 돌려놓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굳이 저녁이라고 콕 집어 이야기한 게 설명되지 않는데요. 설마 느지막이 일어나서는 팔자 좋게 게임을 즐기다가 오는 시간까지 계산에 넣은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미아 아가씨랑 점심을 같이 드시고 온 건 아닐까요?”
“이모네랑은 어제 먹었어. 사실 이건 그 가게 상자에 들어있지만, 거기 주인아저씨가 만든 게 아냐. 아저씨가 도와주긴 했지만, 일단은 내가 직접 만들었어. 그런데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어서….”
무슨 화려한 디자인을 하거나 글씨와 그림을 케이크 위에 새겨넣은 것이 아니기에, 엄밀히 말해서 유단이 한 일은 빵과 크림과 과일을 어떻게든 조립하는 일에 가까웠다. 하지만 겨우 하나를 만드는 데 일곱 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하면 다들 고개를 저을 게 뻔하다. 그것만큼은 요괴들에게 비밀로 해야 했다.
“그래서 그랬구만. 그런데 왜 하필 케이크지? 천호님은 아시겠습니까?”
“아, 혹시 액구슬 때문에 죽을 뻔했던 날을 비롯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의미입니까? 이걸 만들면서 조금이라도 신중함이라는 덕목을 터득했길 바랍니다만. 아무래도 이런 바보에게는 요원한 일이겠지요.”
“아니, 그렇지만 디저트 말고 밥은 처음부터 패배가 정해져 있잖아! 내가 어떻게 이겨!”
시선이 자연스럽게 흑요한테 모였다. 구렁이 요괴는 우쭐해져서 예정된 승리를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공격에 가세했다.
“그런데 애초에 왜 먹을 거로 사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한번 학습되면 다른 생각을 못 하는 거야. 인간 말고 요괴도 경계해야 할 문제야.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해.”
“그래도 형님이 직접 만든 거니까 공산품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선물 아닌가요?”
그렇게 채우 빼고 다 같이 유단을 비하하면서 상자를 열어보았다. 다행히 오는 길에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동자삼들은 멀쩡하게 생긴 과일들을 보고 눈에 띄게 기뻐했다. 도씨는 생각보다 모양새가 괜찮다며 허허 웃었다. 다른 둘도 트집을 잡지 않는 것으로 보아 외관에 크게 불만은 없는 것 같았다.
유단이 열심히 만들어온 케이크는 다시 상자에 넣어졌다. 저녁 식사 전에 단것을 먹으면 입맛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요괴들은 유단에게 손을 씻고 오라고 강요했다. 다녀오니까 흑요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각자 준비해 온 것을 꺼내들고 있었다. 이제 요괴들의 선물 증정식이 열린 것이다.
도씨부터 시작했다. 문외한이 보아도 귀한 티가 나는 고서적이었다. 유단이 조심스럽게 넘겨보자 삽화와 한자들이 있었다. 그림을 보니 도깨비와 관련된 내용인 것 같았다. 나례놀이 때 입었던 의복도 한구석에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도씨가 직접 엮은 한글 번역본도 함께 받았다. 삽화도 거의 비슷하게 그려져 있었다. 유단이 한자에 조금 친숙해졌다고 해도, 싫은 기분이 안 든다는 것뿐이지, 알고 있는 글자는 거의 없다. 요즘 고등학생의 수준을 잘 아는 배려가 느껴졌다.
“오라버니, 이건 그동안 제일 애지중지하던 책이 아닙니까?”
“가장 아끼던 거니까 기쁜 날 선물로 주기 딱 좋지 않으냐. 그리고 왠지 조만간 한 번쯤 읽게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예감이 들더군.”
“고마워. 지금까지 본 책 중에 제일 재밌어 보이고 안 졸릴 것 같아. 그렇지만 이걸 잘 간직할 자신은 없는데. 책이라는 거 생각보다 잘 보관하기 되게 어렵지 않아? 오래된 책은 몇십 배로 더 어려울 테고.”
골동품과 옛것들을 향한 도씨의 애정을 잘 알기 때문에, 유단은 한참이나 그를 설득했다. 결국 번역본만 집으로 가져가고 고서적은 천호의 서재에 따로 한 칸을 마련해서 보관하기로 했다. 유단이 앞으로 선물 받는 귀한 책들은 전부 그 한 칸에 꽂히게 될 것이다.
과연 그에게 책을 선물하는 용감한 요괴 또는 사람이 몇 명이나 더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서재를 제대로 가꾸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십니까? 책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것도 까다롭지만, 습도나 조도를 알맞게 조절하는 것은 물론이고 벌레를 비롯한 사악한 것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신경 써야 합니다. 그 밖에도 설명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규칙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저에게 대출과 반납이라는 업무까지 도맡으라는 겁니까?”
“반납까지 네가 해줄 거야?”
그래도 백란의 기분이 정말로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뒤이은 유단의 질문을 듣고는 조금 기가 막힌 것 같았지만.
그리고 그다음으로 받은 건, 채우와 채설이 함께 뜬 장갑 한 쌍과 귀를 덮어주는 모자였다. 이번에는 생일이 언제인지 미리 알고 있었기에 시간이 넉넉했다. 그래서 앙증맞은 강아지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에게 꼭 맞는 크기였다.
색은 고등학생의 감수성을 고려해서 검은색이었다. 모자에는 하얀색으로 자수 무늬가 들어가 있었다. 인동초 무늬라고 설명해줬는데, 잘 몰라서 유단은 몰래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봤다. 대충 보니까 오래 살라는 좋은 뜻인 것 같았다.
“과거 사람들은 머리와 귀를 따뜻하게 할 목적으로 볼끼나 남바위, 아얌 등을 착용했습니다. 요즘은 귀도리라고들 부르더군요. 케이크를 들고 오면서도 장갑 하나 챙기지 않은 저 심각한 바보에게 딱 좋은 선물입니다.”
“이런 건 아이들이 쓰는 거 아냐? 시커먼 고등학생이 쓰면 좀 꼴사나워 보일 것 같은데.”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따뜻하게 다녀라. 올해 겨울은 작년보다 더 추울 수도 있다고 하니.”
“맞아요! 그리고 형님이 쓰고 다니는 걸 보면 이 멋진 패션 아이템을 갖고 싶은 사람들이 가게로 찾아올지도 몰라요.”
“뭐야, 내가 광고 모델이었어?”
하여튼 이 요괴들은 올해 들어서 손님을 늘릴 생각밖에 안 하고 있다. 이런 거에 신경 쓸 여유도 있고, 천호가 돌아온 뒤로 다들 마음 놓고 지낸다는 의미 같아서 괜찮았지만, 몇 년 뒤에는 인간들의 자본주의에 잠식당하는 게 아닌지 가끔 무서울 때가 있다.
“혹시 색이나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어도 좀 참아. 얼마나 귀한 재료로 짠 건데. 게다가 기도하면서 떠서 엄청 오래 걸렸다고. 잃어버리면 안 돼!”
「잃어버리지 않기로 엄마랑 약속해 줄래?」
유단은 돌연 스쳐 가는 옛날 기억에 잠시 멍해졌다. 그 반응을 보고 오해한 건지, 채설이 황급히 덧붙였다.
“그래도 괴이를 해치우다가 찢어지거나 잃어버리면 그때는 정상참작이 가능하니까. 또 만들어줄 수 있어.”
“누나가 한 말은 어디 넣어둔 채로 잊어버리거나 학교 서랍 같은 곳에 두고 다니지 말고 소중하게 대해달라는 소리예요.”
“……당연하지. 마음에 들어.”
그렇게 짤막하게 대답하고 받아 들었다. 채설이 혹시나 오해해서 슬퍼지면 안 되니까 겨울 내내 매일매일 끼고 다닐 것이다.
어색함을 숨기려고 재빠르게 손을 뻗었다. 백란이 준, 비단으로 곱게 감싸인 꾸러미의 끈을 만지는 찰나.
“아. 그건 자고 일어나서 내일 아침에 풀어보는 게 좋을 겁니다.”
“왜?”
“감당할 자신이 있다면 지금 여십시오. 그리고 어차피 오늘 밤은 도깨비들에게서 몰려온 선물을 뜯어보는 것만으로도 부족할 텐데요.”
천호가 이렇게 나올 때는 얌전히 말을 듣는 것이 좋다. 다른 요괴들도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꾸러미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백란의 금고에 누구의 손도 닿지 않게끔 안전하게 넣어둔 뒤 다같이 저녁밥을 먹기로 했다. 하여튼 저 여우는 꿍꿍이와 비밀 없이 살아가는 날이 없다.
흑요는 자신이 사려 깊은 선물을 고르는 일과 거리가 멀다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다 해줄 테니 말만 하라고 가을부터 통보했다. 유단은 그 얘기를 듣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네가 해주는 요리는 하나같이 다 맛있어서 아무거나 괜찮다고 그렇게 대답했다. 그랬다가 한참이나 잔소리를 듣게 됐었다.
「지금 이게 인간이 생일상을 대하는 태도냐! 앞으로 소화 능력은 줄어들고 미각 역시 감퇴할 일밖에 안 남았는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좋아하는 걸 많이 먹어둬야지!」
그 ‘생각 없이 사는 단명종’ 사건은, 흑요가 알아서 할 테니 불평불만을 가지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끝났다. 그래서 유단은 미역국만 올라오는 풍경을 상상했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 끓여준 거니까 무척 고마운 일 아닌가.
그런데 지금 차려진 것을 보니까 이모가 차려주신 것의 세 배는 호화로운 것 같았다.
미역국에 흰 쌀밥은 너무 수수해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갈색과 빨간색 사이의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띠는 떡이 한 접시 있었다.
“요즘 애들은 떡보다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해서 더 준비하지는 않았지만, 수수팥경단은 귀신으로부터 사람을 지켜준다 하니 밥을 다 먹고 하나는 꼭 집어 먹거라.”
“그런데 누이. 북촌이랑 서촌에서 경쟁이라도 하듯 보내온 저 두텁떡이나, 오색송편은 다 어떡하지?”
“뭐가 걱정입니까? 모름지기 사람이란 공부를 하다 보면 자연히 주전부리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내일부터 동계 훈련처럼 여기에 묶어놓고 예습, 학습, 복습만 시키면 되지요.”
그리고 저런 사악한 계획을 늘어놓는 백란…이 좋아하는 요리들이 아주 휘황찬란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치킨은 빠져 있었지만 아름답게 빛나는 과일화채도 볼 수 있었다.
불평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유단의 뇌는 생각보다 말을 빨리 내보내는 기능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다.
“잠깐만, 이게 다 뭐지. 혹시 지금이 음력 오월인가?”
“됐다. 네 녀석처럼 미식에 재능이 없는 자를 위해 고생하느니 천호님께서 맛있게 드시는 게 훨씬 낫지.”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유단은 얌전히 상 앞에 앉았다. 점심을 못 먹어서 배가 고프기도 했다.
나란히 둘러앉아서 밥을 먹었다. 수저가 접시를 오갈 때마다 다들 맛있다고 감탄하면서 꼭꼭 씹어먹었다. 가만 보면 흡족하게 식사하는 백란보다도 그런 여우를 보는 흑요가 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유단은 팥떡 두 개를 마지막으로 식사를 마쳤다. 뭔가 찝찝해서 빈 밥그릇을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 까먹었어요. 케이크 먹을 배를 남겨둬야 했는데요!”
“게다가 우리는 이제 케이크가 두 개야. 큰일 났어.”
“어? 왜? 아……. 내가 사지 말라는 이야기를 안 했구나.”
인간이 몰래 만들어온 것 하나, 그걸 모르는 채로 요괴들이 다른 가게에서 사온 것 하나. 그나마 생크림과 초콜릿으로 서로 맛이라도 다른 게 다행이었다.
“일단 촛불부터 켜고 둘 다 조금씩만 잘라서 먹자꾸나. 인간들 사이에서는 힘차게 숨을 불어서 초를 끄고 소원을 비는 문화가 있다고 하니.”
“네. 오라버니는 가서 깨끗한 접시와 포크를 가져와 주십시오. 빵 칼을 쓰면 되니 칼은 괜찮습니다.”
다들 분주하게 상을 치웠다. 유단도 국그릇과 접시 몇 개를 나르고 상 위를 닦았다. 그 위에 케이크 두 개를 올렸다. 촛불은 양쪽 다 큰 초 한 개씩 꽂았다. 케이크 크기도 비슷하고 초의 높이도 똑같은데 케이크의 색깔만 하얀색과 짙은 갈색으로 서로 대비돼서 꽤 우스꽝스러웠다.
유단은 내년에는 조금 더 그럴듯한 선물을 준비해 오고 싶어졌다. 케이크를 구실로 한곳에 모여 차를 마시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좋아서, 깊게 고민하지 않고 이걸 만들기로 결정했는데. 모두 따로따로 선물을 챙기는 게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우리는 그만 쳐다보고, 어서 인간답게 소원을 비시지요.”
불꽃이 아름답게 타올랐다. 유단은 크게 숨을 내쉬면서 한쪽 초를 먼저 껐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다 같이 잘 헤쳐 나가게 해주세요.
그리고 마저 남은 초도 크게 불어서 껐다.
―반월당 식구들이랑 친척들이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주세요.
이 모든 게 어색했다.
요괴들이 인간의 풍습을 챙겨주고, 인간은 살면서 처음으로 혈육이 아닌 가족들과 생일의 밤을 함께 보내고 있다.
예전이었다면 애초에 소원이라는 게 꼭 있어야 하나, 그렇게 삐딱하게 이야기하고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이야기라는 듯 뒤로 빠져버렸을 것이다. 기껏해야 자신을 내버려 두라는 걸 소원이라고 말했으리라.
이제는 진지하게 바라, 본다.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초에서 흘러나온 연기가 공중으로 모두 흩어질 때까지. 유단은 그렇게 간절히 바랐다.
후기
안녕하세요. 마디입니다.
이 합작이 공개될 때에는 반월당 외전 2부가 연재되고 있겠죠? (서동요 기법을 시도하는 동인의 모습)
이렇게 지웠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한 원고는 처음이네요.
논컾 합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최소한 반월당 식구들은 다 등장시키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줄거리를 정할 때부터 고민이 다소 길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추린 소재는 1. 엄마의 기일에 추억을 곱씹는 이야기 2. 유단이가 자기 생일에 케이크를 스스로 만들어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선물하는 바보같은 이야기 ― 이렇게 두 가지였어요. 이걸 섞어보려다가 1번에 해당되는 분량은 원작과 맞지 않는 것 같아 거의 다 삭제했습니다.
그리고 이모네 가족이 그 이듬해 생일을 벼르고 있을 것 같아서 이쪽 이야기도 초반부에 짧게나마 써보았습니다.
그래서 이게 유단이에겐 처음으로 생일날 미아네 말고 다른 가족들이랑 지낸 날이기도 하고… 또 반월당 식구들에게는 꿋꿋이 잘 생존한 인간이 뒤늦게 감사 인사를 전한 날… 그런 의미의 제목입니다. 그 다음에 바로 월간 동양화를 사러 가게에 갔지만, 팔목귀가 없어진 다음 육성으로 이야기를 듣는 건 또 조금 다른 의미일 것 같아요.
인외걸즈 3인방은 유단이랑 가깝기는 해도 '가족'의 바운더리에 들어오기는 살짝 애매하다고 느껴서 지나가는 대사로만 등장시켰습니다. 케이크 가게 주인이나 도깨비들도 마찬가지고요.
+천호님의 선물은 일부러 비밀로 했습니다. 각자 원하는 대로 상상해주세요!
bottom of pa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