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산 위의
문월 | @Lisianthus_115
양손으로 흙을 다져 누르는 일을 마치고 삼왕자는 허리를 폈다. 그는 날개 펴지 못한 나이에 둥지에서 발을 헛디딘 어린 새의 피가 고인 자리로 손을 털었다. 하얗게 흙먼지 엉기는 까만 얼룩을, 발로 휘저어 마저 가렸다.
그가 묻은 몸의 부모일 새들이 둥지 안으로 깃털을 묻는 소리가 들렸다. 숲 위로 해가 붉게 내려앉고 있었기에 삼왕자는 그만 새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떠나기로 했다.
도깨비들이 만들어준 지도를 펴며 눈을 들자, 기둥처럼 고요한 나무들 중 어느 한 방향으로 늘어선 무리가 일제히 양옆으로 미끄러져 길을 터주는 환상이 보였다. 그리로 나아가며 삼왕자는 말없이 생각을 떨어뜨렸다. 여우가 있구나. 삼왕자가 낙엽 사이에 누운 어린 새의 몸을 발견한 때에도 수 발짝 뒤에 숨어 따라오고 있던 여우. 그가 무엇을 기대해 삼왕자가 언 땅을 갈라 봉분을 쌓도록 기다렸는지 짐작하기란 어려웠다. 삼왕자는 그가 질려 돌아간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한데 길을 살피던 눈은 나무 뒤에서 쉬던 여우의 형체를 들춰냈다.
밝은 꼬리털이 삼왕자의 걸음을 쫓아 잔상처럼 그의 시야 가장자리를 간지럽혔다. 그것이 거슬려 삼왕자는 눈에 힘을 풀었다. 여우는 몸은 철저히 감추면서 꼬리만은 허공을 나돌도록 내버려두었다. 삼왕자에게는 그것이 금붕어에게 흔드는 깃발처럼 보였다.
삼왕자는 태양의 빛이 마른 나뭇가지에 눌려 일그러진 것을 확인했다. 하늘이 검어질 시간이 멀지 않았다. 삼왕자가 가던 방향에서 작은 산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도는 그 곁의 샛길로 돌아서 가도록 인도하고 있었으나, 삼왕자는 예정을 바꿔 산을 통과하기로 했다. 그는 그 산을 알았다. 이 년 전 악한에게 목숨을 빼앗긴 여섯 자매가 머무는 곳이었다.
자매를 해한 죄인은 하루도 못 되어 붙들렸다. 자매의 시신은 양지바른 곳에 안장되었다. 자매의 넋은 피 뿌리며 고향 마을로 뛰어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의 혈관을 돌던 액체가 빛바랬을지라도 그들에게는 눈물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의 어린 몸이 묻힌 땅 위에서 그 몸이 따뜻하던 시절을 그렸고 서로의 넋이 어떤 꼴인가 훑으며 흐느꼈다. 그러는 소리에 그들의 옛 기억이 배었다. 그것은 목구멍을 벗어나 산 것처럼 무덤터의 면과 면을 울리며 길을 지나는 생자를 혼미하게 했다. 몇몇 도깨비들조차 불평하며 삼왕자를 찾아올 정도였다.
삼왕자는 그전에 인근의 산에서 산주 행세를 하던 이무기의 목을 벤 적이 있었다. 이무기가 차지했던 산은 폭정이 그치고서도 죽은 땅으로 남아있었다. 자매를 찾아가 그 내력을 확인한 삼왕자는 도깨비를 부려 그리로 자매의 시신을 이장하게 하고, 생자가 그곳에 드나들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전해 듣기로 자매는 산에서 고누놀이하는 일도 생겼고, 가을이면 더러 낡은 연을 구해 종일 날리는 날도 생겼더라고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들 우는 소리에 건장한 젊은이조차 도망치던 것이 불과 이 년 전이었다. 그 소리라면 사정 모르는 어린 천호의 주의를 돌려 추격을 그치게 하는 일쯤 해낼 수 있을 것이었다.
이무기가 다스리던 산에는 나무 한 그루 살아있는 것이 없었다. 삼왕자는 신발을 고쳐 신는 시늉 하며 산 문턱의 물렁하게 부풀어 오른 나무 밑동을 상체로 가렸다. 삼왕자는 그 아래 묻어두었던 부적을 한 손으로 더듬어 끄집어냈다. 그가 입안으로 주문을 외자 하얀 떡을 뱀만치 늘려 놓은 모양의 작은 도깨비가 나타나 복배했다.
천호가 입산하고 나면 이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아라. 그러지 않으면 생자가 이 산을 발견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
삼왕자의 입 모양을 읽은 도깨비가 재차 복배했다. 삼왕자는 주먹에 말아 넣었던 부적을 옷의 흙먼지 터는 체하며 그에게 떨궜다. 삼왕자는 정면을 향해 온몸을 고정했다. 그는 문간을 뛰어넘듯이 큰 보폭으로 산에 첫 발을 넣고, 곧장 그리로 걸어 들어갔다. 썩어 늘어진 나무의 말단이 머리 위에 발을 드리웠다. 삼왕자는 바람 소리 한 줄기 없음을 느꼈다.
삼왕자는 산을 올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산 정상이 자매의 거처이니, 자매가 슬픔에 빠지지 않는 날에도 그 일대에는 우는 소리가 몇 가닥 떠돌고 있을 법했다. 그나마도 없을 만큼 자매가 운 날이 오래되었다면 여우를 매단 채 도로 산을 나가야 하나, 삼왕자는 고심했다. 그는 근처에 낡은 연이 떠 있지는 않은가 보았다. 하늘은 고요했다. 삼왕자는 수풀에 다리를 부딪칠 뻔했다.
전에도 지났던 통로가 초목에 막힌 채였다. 지리를 살피려 걸음을 물리던 삼왕자는 등으로 또 무언가를 들이받았다. 지나가는 바람에 부푼 옷자락처럼 그의 시선에 한발 앞서 형체가 꺼졌는지, 돌아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산 입구가 불과 십수 걸음 너머에 보였다.
삼왕자는 자매를 불렀다.
그 소리가 퍼져 나가지 않고 정적에 먹혔다. 티 없이 붉은 복사꽃이 삼왕자의 신발에 앉았다. 죽은 나무가 새끼를 쳤는지 출입이 막힌 산에 누군가가 건강한 묘목을 심어두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비처럼 날려가는 꽃망울을 행과 열 맞춰 늘어선 잔디가 받아냈다. 그들의 파릇한 무리는 동산을 이루며 하늘에 맞닿았고, 하늘에서는 푸름이 쏟아질 듯했다. 그 색에 잠겨 언덕 반대편을 내다보던 여자들의 뒷모습이 있었다. 삼왕자는 그들에게로 발을 옮겼다. 풀 꺾이는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몇 걸음 움직이지 않아 파릇하고 푸른 것들은 자기 색을 버티지 못하는 것처럼 눈 앞으로 흘러내리고.
하얀 햇살이 비쳐 들었다. 양팔로 짐을 안고서 개울가로 나아가는 한 여자아이의 형상이 시야에 걸렸다. 그의 낯은 개천이나 금속에 비친 상처럼 탁했고, 하관의 작게 열린 입 틈에서는 개울을 건너는 발걸음과 다른 시간을 사는 듯한 진동이 울려 나왔다. 그 입의 모양으로 삼왕자는 소리의 윤곽을 더듬었다.
탄식이다.
삼왕자는 바다 아래서 휩쓸리다 수면으로 머리를 빼낸 이가 자기 안면을 덮치는 파랑을 마주하듯 깨달았다. 피부 겉에서 울렁이던 소란이 일제히 줄을 서 그의 귓구멍으로 꽂혔다. 길게 우는 소리가 꼬리를 물었다. 개울가 버드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푸른 잎이 난파선처럼 울음에 좌우로 휩쓸리고, 연거푸 탄식하던 여자아이의 형상은 물을 나오지 못했다. 그의 머리카락이 수면에 펼쳐지더니 한 점으로 사라졌다. 즐겁던 시절을 불러내고서 그 기억에 다시 통곡을 시키는구나. 삼왕자의 말은 우는 소리에 밀려 떠났다. 소리가 몰려간 방향에서 소리가 돌아와 삼왕자의 정수리에 새로운 기억을 끼얹었다. 손을 맞잡은 두 여자가 철쭉 빨갛게 핀 사이로 삼왕자를 지나쳐갔다. 봄날에 자기네가 어떤 모습이었던지 귀신들이 기억하지 못하니 그들의 낯은 나무껍질로 덮인 듯했다. 삼왕자는 그 형상에서 둘째와 셋째 귀신을 보았다.
잔칫집에서 나눠준 다과를 안고 개울을 건너려던 것은 넷째. 그전에 보인 곳은 봄 오면 다섯째가 자매를 이끌고 나들이 갔다는 집 뒤편 언덕. 수풀 우거진 산에서 냉이 캐던 것은 막내 아이. 삼왕자는 그들을 나란히 떠올렸다. 그는 혀를 찼다. 삼왕자가 자매를 처음 찾아갔던 때에는 그들의 통곡이 들리고 보이기라도 했다. 그들에게 울지 않는 날도 생겼다던 소식통이 잘못되었던가. 삼왕자가 확인해야 할 일이었다.
그가 눈을 열자 산이 내려다보였다. 여우는 시선 닿는 곳에 없었고 자매는 이무기가 지었다던 산마루 고택에 모여 있었다. 몇몇 자매가 시체처럼 누운 가운데서 첫째 귀신이 입을 움직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야 그들 앞에서 들으면 될 일이라 삼왕자는 주의를 거두고 휘파람을 불었다. 다리 여섯 달린 말로 화한 바람이 삼왕자의 옷자락을 물고 땅을 크게 박찼다. 삼왕자의 안면에 덩어리진 공기가 겹겹이 부딪치더니, 그가 참다못해 눈을 닫고서야 그쳤다. 삼왕자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귀가 평온했다. 삼왕자는 대청마루에 앉은 귀신들을 보았다.
이제 막 예를 갖춰 마중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하품하거나 기지개를 켜던 그들 사이에서 첫째 귀신이 목소리를 냈다. 삼왕자를 놓아준 말이 갈래갈래 바람으로 돌아갔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저택 기와에 참새 귀신이 내려앉았다. 삼왕자는 자매에게 삿대질하려던 손을 돌려 산 아래를 가리켰다. 자매의 시선이 서로의 얼굴 사이를 돌았다. 곧 첫째 귀신의 머리카락이 뻗어나가 둘째 귀신의 팔을 찔렀다. 둘째 귀신은 마루 밑으로 발을 내리더니 발치에 앉은 강아지 귀신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그가 홀연 개의 하얀 등에 머리를 파묻었다.
“오늘이 저희가 숨을 거둔 날이잖아요. 지난 일을 더듬으니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다 같이 잠들어 있는 게 나을 것 같았어요. 손님이 왔다고 얘가 깨워준 게 방금이고요.”
마당 저편에 서서 떠도는 통곡을 한 가닥씩 거둬들이던 셋째 귀신이 언니의 곁으로 와 개털 속에 나란히 얼굴을 숨겼다. 그들의 다른 자매는 양손으로 뺨을 감싸거나 헛기침했다. 삼왕자는 토끼 굴에 머리를 들이민 독수리가 된 기분으로 입을 벌렸다.
“맞다. 완전히 잊고 있었어.”
대청마루는 목재를 손수 깎아 만든 듯한 주사위와 팽이와 죽마가 널린 모습이었다. 낮 동안 햇살이 충분히 들었는지 그 광경 나뭇결에 어린 물 자국이 벌써 희미했다. 셋째 귀신이 얼굴을 다시 드러냈다. 그가 내뱉는 말이 바람 같았다.
“오늘은 아름다운 분의 기일이기도 하지요?”
하늘이 끄트머리만 복사꽃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삼왕자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맞아. 그래서 찾아뵈러 가는데 뭘 알고 그러는지 천호가 따라오길래 떼어놓으러 들렸던 거야. 걔는 너희가 내보내 준 건가?”
넷째 귀신이 입을 양쪽으로 끌어당겨 웃었다.
“그분은 이 산에 아예 발을 들여놓지도 않으셨어요. 더구나 저희 우는 것을 듣는다 한들 하늘에서 오신 분이 땅에 매인 자들의 희비에 미혹될 리가 없잖아요.”
“내내 미행하더니 왜 그랬나 모르겠네. 잘 속여서 끌어들인 줄 알았더니 뭔가 이상한 걸 감지했나 봐. 괜히 여우가 아니야.”
삼왕자는 눈 아프게 어른거리던 꼬리를 떠올렸다. 귀신들이나 여우나 자신을 자빠트려 허우적거리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라고 그가 생각했다. 헤매던 통곡이 고택으로 다가왔다. 셋째 귀신이 그것을 마저 거둬들이러 뛰어나갔다. 둘째 귀신이 따라 일어났다. 어머님의 묘를 찾아감에 기일을 넘길 수는 없겠지요. 다섯째 귀신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산 아래서 뛰어 올라온 것처럼 뻗친 머리를 한 그가 말했다.
“도깨비를 시켜 천호님이 들어온 다음에 산 입구를 막도록 해 두셨지요? 그 애에게는 제가 방금 다녀와 잘 말해 두었어요.”
삼왕자는 옷에서 죽은 나무껍질과 흙먼지를 털어냈다.
“그 사이에 생자가 산을 찾아오지는 않았지?”
“네, 그러니 염려 말고 떠나세요.”
막내 귀신의 말이었다. 첫째 귀신이 손을 뻗었다. 귀신의 엄지와 검지는 삼왕자에게로 한 치 다가올 때마다 간격이 두 배가 되어 그의 양 어깨를 쥐기에 이르렀다. 귀신의 손바닥이 드리운 그늘이 걷히자 산 출구였다. 썩은 고목들이 바람에 가지를 날렸다. 하늘은 구름만을 남긴 수묵화처럼 비어 있었다. 산 앞의 숲에서 달 같은 빛이 어른거려 삼왕자는 그곳에 여우가 있겠거니 생각했다.
무엇을 바라고 궁중에서 등불이 켜질 시간까지 임야에 나와 있는지 물을 여유가 없어, 삼왕자는 어려운 책을 대하듯 여우를 곁눈질하기나 했다. 그는 다른 귀신산에 들르지 않았다. 그는 월성을 나올 적 해가 이미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왕이 그를 불러들여 계림에 일어났다는 괴이한 일에 관해 자문을 구해왔기에 그전에는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물론 삼왕자는 왕에게 어머니의 기일임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류씨 성을 가진 서라벌의 왕족이었다. 그를 혼자 키웠으므로 어머니는 그에게 자신의 성을 붙였다. 한데 궁에서는 가장 어진 이들조차 그의 성을 모른 척해주는 것을 예의로 여겼다. 나무가 서 있는데 그 밑에 뿌리가 없다 해야 하는 꼴이었다.
묘지로 올라가는 산길 앞은 초목 그림자가 짙었다. 삼왕자는 일가가 떠난 고향 집을 찾은 것처럼 한 발씩 나아갔다. 장례를 주관한 도깨비들이 묘 입구를 지키라고 세워두었던 사자상 한 채가 돌길 왼쪽으로 나타났다. 삼왕자는 그리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고, 거기에 팔을 걸친 채로 시선을 옮겼다. 길 반대편, 비어 그늘만 고인 공간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어둠 너머에서 쇠와 돌이 부딪히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여우의 것일 광채가 그 방향에서 새어 나왔다. 삼왕자는 주먹에 파란 불을 피워 전면을 밝혔다. 수풀 안에서 창을 길게 빼 호선을 그리던 여우가 그를 향해 귀를 세웠다. 푸르스름한 빛이 일렁이는 그의 얼굴은 환영처럼만 보였다. 여우의 상대는 자리를 이탈한 사자상이었다. 묘 입구의 사자상이 본디 두 채였다는 것을 삼왕자는 떠올렸다. 돌로 된 짐승이 흙바닥을 긁고는 여우에게 솟구쳤다. 여우가 창대로 땅을 내려치니 그의 발밑에서부터 얇은 벽들이 연꽃처럼 피어났다.
뒤이어 반원을 그리며 가로로 누운 창이 사자 머리를 찌르고 들어갈 자세를 잡았으나, 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수리로 여우를 들이받았다. 여우의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이 둥글게 모였다. 그의 옷자락이 흩날리는가 하더니 그를 감싼 연꽃의 형상이 통째로 벼랑에 튕겨 나갔다. 삼왕자는 궁중의 개에게 채여 허공을 나는 가죽 공을 떠올렸다.
그는 팔을 내질러 사자상의 주둥이를 밀어내며 따라서 뛰어내렸다. 숨 한 모금 들이마시는 새 낭떠러지 아래가 목전에 닥쳤다. 삼왕자는 무릎을 굽혀 착지했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던 여우의 눈이 그 위에서 반들거렸다.
“저건 뭐야?”
그는 벼랑에서 떨어지기 직전까지도 삼왕자와 재잘거렸던 양 공백 없이 말소리를 떨어뜨렸다. 삼왕자는 말려 올라간 옷소매를 내렸다. 바람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넘기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밤공기가 지나갔다. 삼왕자가 숨을 내쉬었다.
“인사는 안 해?”
“내가 누구인지 알잖아.”
여우는 창으로 벼랑 위를 가리켰다. 삼왕자는 작은 용처럼 생긴 짐승을 불러내어 창대를 휘감았다. 설명할 테니까 가만히 있어. 창끝이 바닥으로 기울자 삼왕자는 짐승을 돌려보내고 말을 골랐다. 그는 절벽 끄트머리에서 사자상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온 참이었다. 사실 사자상은 도깨비들이 내려 둔 명령에 따르던 것에 불과했다. 명령인즉 침입자를 모두 경계하되, 천호가 나타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쫓아버리라던 것이었다.
“내 가신들이 준 거야.”
“그럴 줄 알았어. 그 도깨비들은 나를 싫어해.”
“네가 이렇게 나를 괴롭히니까 그렇겠지. 대체 뭣 하러 따라온 거야?”
삼왕자는 벼랑 그림자 진 곳을 발로 몇 번 찔러보고 그 아래에 앉았다. 여우는 서서 말했다.
“너를 만나러 갔더니 네 가신인 쌍둥이 남자애가 네 흉내를 내고 있었단 말이야. 가신들이 왕위를 찬탈해서 네가 군사를 규합하러 떠난 거면 어쩌려고 그걸 내버려두겠어. 저런 석수가 있는 것을 보니 무덤을 찾아온 거였던 모양이네. 누구 무덤이야?”
삼왕자는 여우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자신을 만나려 했다고 말할 거라면 그 이유도 설명해야 한다는 소리가 입속에서 어룽거렸다. 가신들이 반역할 것을 염려했다고 이야기하는 혀. 달 같은, 아니면 허깨비 같은 빛이 눈꺼풀에 드리웠다.
“우리 어머니. 여우와 같이 뵈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가신들을 데리고 오는 건데.”
삼왕자는 하얀 숨이 공기에 녹자 이어 말했다.
“돌아갈 생각 없어?”
“다리 아파.”
투정하면 비단 이불로 감싸주었을 궁중을 떠나온 게 누구인가 생각하며 삼왕자는 일어섰다.
“그러면 빨리 올라가기나 하자. 가신들이 만들어준 물건을 상하게 할 수는 없으니 쟤를 달래거나 피해서 갈 방법을 궁리해야겠어.”
사자상이 기존 지시와 상충하는 명을 받아들이리라 믿을 수 없으니 삼왕자는 암벽을 올라 그것의 눈이 미치지 않는 길을 찾아내자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다. 그는 벼랑의 높이를 확인했다. 그가 뛰어내리며 어림했던 것보다 목을 더 꺾어야 절벽 너머가 눈에 담겼다. 절벽 끄트머리가 사자 머리처럼 둥글게 솟아 있어서 그런 것인가 생각하던 삼왕자는 사자 입속에 들어와 있음을 처음 깨달은 고기가 된 듯 오한을 느꼈다.
“저기서 뭘 하는 거지? 내려와서 너를 마저 잡으려 하는 것도 아니고.”
사자상이 그 자리에 조각된 것처럼 절벽 끄트머리에 무릎을 꿇고 갈기를 치켜든 채였다. 아래를 향한 그것의 동공에 빛이 하얗게 고여 있었다. 움직이면 추격할 태세였다. 그러면서 지금 물러나지도 다가오지도 않고 있는 연유는 무엇인가?
죽엽군이라도 이용하려고 나뭇잎을 찾던 삼왕자의 눈이 추가 달린 듯 땅으로 미끄러졌다. 바닥에, 추운 날 유리를 만지면 남는 손자국처럼 하얀 동물 그림들이 어려 있었다. 삼왕자의 시선을 따라 젊은 도깨비의 다리에 누운 사슴과 사슴의 배 위 고양이 하며 뿔 달린 거미가 드러났다. 꼬리를 두 개 단 늑대가 앞발로 고양이의 볼을 찌르고 뱀 꼬리는 그 늑대의 귀를 짓누른다. 흩어진 몸들이 서로를 떠받치고 서로를 베 그들의 윤곽을 그리는 하얀 선들이 하나처럼 이어지니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도깨비의 왕이 어머니를 모신 산이라면 일대가 명당이겠지. 자비로운 왕이 묫자리 곁의 남은 공간을 빌리는 데에 노할 리는 없으니, 가족과 친구의 극락왕생을 바라지만 좋은 터를 찾을 힘이 없는 것들이 그들을 이곳에 묻어 둔 거야.”
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덜 마른 수묵화를 덮은 종이 위로 먹이 번지듯, 서투르게 묻힌 형체들은 땅 위로 희게 비쳐 나왔다. 삼왕자는 어느 고양이의 꼬리 위에 올라가 있던 신발을 치웠다. 고양이가 귀를 펄럭이며 배를 드러냈다. 여우는 백색 선 사이의 섬 같은 땅에 다리를 모으고 있었다.
“저 사자상의 발로는 이 몸들을 다 피하기는 어렵겠지. 그걸 생각해서 절벽 위에 남아 있던 거면 대화가 통할 테니까, 너랑 싸우지 말라고 직접 얘기해야겠어.”
삼왕자가 말했다. 그는 다리를 뻗어 암벽을 디뎠다. 여우는 따라오라는 그의 손짓을 보고 발 사이 간격을 더 좁혔다.
“손과 신발에 흙이 묻잖아.”
흙바닥에서 잘 셈은 아닐 테니 삼왕자는 여우를 두고 먼저 절벽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사자상이 뒤로 물러나 그가 설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삼왕자는 그것의 머리를 매만졌다. 삼왕자는 말을 안 듣는 도깨비들이 있다느니 그들보다 알기 어려운 건 여우라느니 궁중 담벼락에 발톱을 가는 고양이에게 말을 걸 때를 떠올렸다.
“쟤는 내가 초대하기로 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사자상은 삼왕자의 손에 갈기를 비볐다.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하던 삼왕자의 목소리가 부드러운 털에 흐려졌다. 사자상은 절하고 등을 돌렸다. 돌길 좌우에 다시 사자상 두 채가 균형을 이뤘다.
삼왕자는 벼랑 아래로 몸을 숙이고 팔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는 여우의 아래서 미풍이 솟았다. 여우는 바람에 감싸여 산 위에 내려섰다. 그가 손을 놓았다. 삼왕자는 실바람이 들어간 옷소매를 흔들고 여우의 앞으로 나섰다. 길의 왼편을 지키던 사자상은 자기 짝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여우 쪽으로 주둥이를 뺄 뿐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삼왕자와 여우는 그들 사이를 지났다. 산 왼쪽으로 곧장 꺾인 모퉁이를 도는 삼왕자의 보폭이 늘고 다시 줄기를 반복했다. 산 측면에 붙어 자라던 나무들이 풍경 뒤로 흘러갔다. 무덤은 야트막한 낙원처럼 누워있었다.
삼왕자는 절에 들어서며 그러듯 걸음을 멈추고 양손을 모았다. 고개를 들고 눈을 뜨고서 그는 제자리에 앉아 풀밭에 손을 내렸다. 묘 위를 덮은 야생초 끝자락이 은빛으로 총총하니 이제 막 별이 뜨는 모양이었다.
“매번 이런 식으로 인사를 드렸어?”
여우가 물었다. 삼왕자는 일어나 무덤에 등을 기대고 다시 앉았다. 그는 메고 온 짐에서 과일들을 꺼내 손 닿는 곳에 늘어놓았다.
“나는 제사를 지내는 순서를 모른단 말이야.”
그렇구나. 여우가 말했다. 삼왕자가 짐을 풀고 있어도 여우는 땅에 몸을 붙이지 않았다. 그는 비석을 지나쳐 무덤 건너에 벽처럼 선 나무들 앞을 돌고 와서는 무릎까지 오는 석수들을 구경했다. 밤그늘 아래서는 이것과 저것 사이의 간격이 흐려져서 그런지 삼왕자는 그가 무덤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여기서 밤샐 거야.”
“그것도 매번 그랬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대접이 변변치 않아서 미안하지만 함께 돌아갈 수 없으니 너라도 슬슬 성으로 출발하는 게 좋지 않겠어?”
“나는 너랑 자고 가려고 했는데?”
여우가 무덤 곁에 멈췄다. 천호가 날이 새도록 돌아가지 않으면 월성에서 일어날 일을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었다. 삼왕자는 고관들의 머리칼이 관모 아래로 삐치고 그들의 눈 밑에 그늘이 지는 광경을 그렸다.
“사람들이 걱정할 거야.”
“내 털을 넣은 짚 인형을 두고 나왔으니 괜찮아.”
여우는 삼왕자가 다른 문젯거리를 떠올리기 전에 옷소매에서 비단 침구를 꺼냈다. 이부자리 펼치는 소리에 삼왕자는 입을 다물고, 옷소매 안에서 잘 수도 있겠다고 속으로만 중얼댔다. 여우는 묘지 한편을 요로 뒤덮고 누워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당겼다.
침구의 온기가 대기에 퍼져서인지 삼왕자도 등에 힘이 풀렸다. 그의 팔이 곡선진 들풀 위를 굴렀다. 무덤에 올린 과일이 알알이 다리에 닿았다. 그들 껍질 위로 도는 윤기가 희끄무레했다. 어머니를 뵈는 날이면 그 과일들로 저녁을 먹던 것을 삼왕자는 그제야 기억해 냈다. 배는 고프지 않아? 그의 물음에 여우는 천호라서 괜찮다고 답했다. 수명이 길어서 그런 건가? 풀벌레들은 하루라도 굶으면 평생 식사할 것의 수십 분지 일을 포기하는 셈일 텐데, 풀벌레들은 알에서 깨면 몇 주 만에 늙어 죽는다더라.
여우가 허공에 팔을 뻗었다. 여기 아직 한 마리 살아있어. 풀벌레가 앞발을 비비는 기척이 삼왕자의 피부를 건드렸다. 어르신이겠네.
여우가 풀벌레를 놓아주었는지 들풀이 나부꼈다.
“소류.”
여우가 삼왕자를 불렀다. 왜. 삼왕자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간 것은 헛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삼왕자는 나무가 된 것처럼 호흡을 죽였다.
“땅 밑에도 네가 있는 것 같아. 산 전체에 있는 건가?”
초목 사이로 빛이 떨어져 내렸다. 달이 하늘에 걸릴 시간이다. 여우가 잠들었다. 삼왕자는 그가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다. 공기가 몸에 스미도록 그들은 나란했다.
후기
중국에서는 성씨 앞에 小 자를 붙인 걸 애칭으로 쓴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신라의 애칭문화가 중국과 달랐을 수는 있겠지만, 저는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삼왕자가 사실 류씨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한번 그러고 나니 류씨 성의 왕족이라는 정체성이나 소류라는 애칭이 삼왕자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이번에 과거조 합작에 참여하게 된 것을 기회로 관련해서 소설을 써보려고 마음 먹었지요. 그런데 전개를 대강 구상한 후에 합작 공지를 다시 살피니, 합작명이 ncp합작이더군요….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착각할 게 따로 있지. 그렇다 보니 유독 임의적인 설정이 많은 글을 쓰게 된 듯한데, 즐겁게 읽어주셨다면 저도 즐거울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