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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기억
살이      |     @sali_mAin1

   그날 그곳에 저도 있었습니다….

   …아, 그래. 분명히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여우가, 기차 안에….

   기차…?

   * * *

 

   -덜컹, 덜컹

   희미하지만 무언가 일정하게 움직이는 진동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 이상한 감각에 눈을 떴다.

   여긴…. 기차? 고개를 돌려 본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내가 왜 여기에….

   여행을 가고 있었잖아.

   아, 맞아 그랬지.

   객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승무원이 객실로 들어온다. 검표를 하러 들어온 듯했다.

    …내 표는 어디 있지? 

   나는 급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봤다.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서 잔뜩 구겨진 낡은 종이 기차표가 나왔다. 요즘도 이런 표를 쓰는 기차가 있었나….

   조심스레 기차표를 펴 보았다. 

   규환 ▶ 대규환 ▶ 초열

   처음 보는 지역 이름인데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애써 기억해 보려고 표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승무원이 다가와 있었다. 가만히 서서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그 시선에, 나는 괜히 오싹해져 손에 든 표를 빨리 건네고자 했다.

   어떤 손이 나타나 그 표를 빼앗아 가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손의 주인, 옆자리 사람은 내 표를 아무렇지 않게 빼앗아 가 숨긴 채 자신이 가진 두 장의 표, 아니…. 그냥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종이를 승무원에게 보여줬다.

   “일행입니다.”

   승무원은 옆자리 사람이 내민 표를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뒷자리로 넘어갔다.

   저것도 표로 쳐주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나저나…. 나는 당황스러움에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옆자리 사람을 쳐다보았다. 

   일행?

   “방금 무슨….”

   나는 정신을 차린 뒤부터 계속 창가 자리에 앉아있었고, 분명 내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이 갈색 머리의 소년은.

   “이제 기차는 질색입니다. 틈을 벌려 잠시 멈추게 할 테니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빠져나가죠.”

   옆자리의 수상한 소년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황당해서 자꾸만 멍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으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아니, 누구…세요? 제 표는 왜 가져가고… 대체 어딜 도착하는데 내려야 한다는…. 잠깐, 애초에 나는 기차에….”

   말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튀어 나갔다.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기차가 아니라 분명 집에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 기차를 타고 ■■을 보러 가고 있었지.

   “제 이름은 백란입니다. 저는 아까부터 옆에 있었는데, 주무시느라 모르셨던 것 같은데요. 그리고 잘못된 표를 내미시길래 마침 제게 멀쩡한 표가 2장 있어서 보여드렸을 뿐입니다. 내려야 한다는 것은, 주무실 때 들린 안내 방송으로는 이 열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다른 열차로 갈아타야 한다고 하더군요.”

   “거짓말.”

   거짓말이라도 좀 성의 있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분명 아까는 그렇게 말 안 했는데. 아무리 ■속이라지만 ■■가 이런 식으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모두가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방금 내가 말을 한 건가?’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자 백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년은 굳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난 그냥…”

   정신이 또 멍해졌다. 이상하다. 왜 그런 말을 했지? 나는 분명 아무런 생각도,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열차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나는 단호한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제서야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들리던 말소리가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맞아, 중요한 건 내리는 거야. 백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년에게 느꼈던 경계심이 느슨해졌다. 원래부터 옆에 있었던 것만 같았다. 어쩐지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까까지는 왜 이 소년을 낯선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잠시 착각했던 것 같다고 말하며 나는 여행을 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누군가와 약속을 했다고.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를 바라보는 백란의 표정이 이상했다. 어딘가 착잡해 보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그런 표정을,

   -끼이익

   기차가 급정거했다. 무슨 일이지?

   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바깥을 보려고 했지만, 백란이 한복 소매로 내 시야를 막았다.

   “고개 돌리지 마십시오.” 

   한복 소매? 아니, 아니다. 이 소년은 교복을 입고 있다. 

   “평소에는 생각을 좀 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더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혼자 앞서 나가시는 건지…. 이들은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인간을 놓칠 생각이 없으니 되도록 어떤 것도 보지 마십시오. 혹여나 알게 되더라도 입 밖으로 내뱉지 마시고요. 그들이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자,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는 겁니다.”

   어느새 기차는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흘끗 백란을 쳐다보면서 방금 그가 한 말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정말 이상하지만, 왠지 백란의 말이 거짓말같이 들리지 않았다. 진짜로 누군가 우릴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떠오르는 여러 의문점을 삼킨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창문 밖 풍경에서도 애써 시선을 돌렸다.

   나와 백란의 대화 소리가 사라지자 다시 기차 바퀴가 덜컹거리는 규칙적인 소리만 들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아까와는 다르게 기차가 굉장히 조심스럽게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멈췄다.

   나는 백란을 쳐다보았다. 백란은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일어나서 복도로 걸어갔다. 나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백란을 따라갔다. 길고 긴 복도를 걷고 있으니, 창문에서 무언가 날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저 앞에서부터 무언가 굴러온다든지. 긴장감에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그런 내용의 영화라도 봤던 것일까? 이상한 기분이었다. 

   앞에 걸어가는 백란의 모습 위로도 다른 모습이 보였다. 황금빛 광채를 내뿜는 아주 신성한…. 거대한 창을 휘두르며 수많은 이들을 이끄는…. 분명 아주 오래전에 내 앞을 가로막았던….

   ‘■■?’

   객실 문이 치익-하고 열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체감상 아주 긴 시간이 걸려 객실 내부 복도를 빠져나온 것만 같았다. 객실 바깥으로 나오자, 활짝 열린 기차의 문 바깥에는 눈보라가 매섭게 흩날리고 있었다. 소리가 스산했다.

   “눈이….”

   “가야 합니다. 내리죠.”

   아무 생각 없이 백란을 따라 내리려고 하는 순간, 

   기차 안에서 어떤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엄마?”

   -탁

   이미 계단 아래로 내려간 백란이 기차 안으로 도로 들어가려는 내 팔을 강하게 잡아챘다.

   “이거 놔! 안에 사람이…!”

   “사람이 있습니까?”

   백란의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묘한 빛이 일렁이는 것 같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속에서 잔뜩 일그러진 내 표정이 보였다.

   ‘단아, 단아? 내 아들, 어디 있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엄마와 탄 기차는 이미 10년 전에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지금 존재할 리가 없다는 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없는, 것 같아.”

   나는 기차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만 할 것 같은 묘한 충동과, 귓가에 맴도는 환청을 무시한 채 눈이 내리고 있는 바깥으로 나왔다. 보이는 것보다 더 미친 듯이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허전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기차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여기가 정거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어느새 저 앞으로 성큼 걸어간 백란을 따라잡고자 힘껏 걸으며 현재 상황에 대해 묻고자 말의 서두를 꺼냈다.

   “저….”

   “내리지 않았다면 또 끌려들어 갔을 겁니다. 본인은 끝났다고 생각하셨겠지만, 10년 넘게 머릿속에 자리 잡아온 악몽이 한 번에 끝날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사냥감을 언제든지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까도 몇 번이나 주변과 동화될 뻔하셨지요. 여기는… 이를테면 악몽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세계라고 설명하면 될까요.”

   백란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너… 대체 누구야?”

   내 앞에 있는 소년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익숙하다고 느끼고 있었더라?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쭉 돋았다. 내가 알던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거짓이었던 거지?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백란, 이라고. 방금 저희가 내린 열차는 초열로 향하는 열차입니다. 초열, 다른 말로는 지옥이요. 내리지 않으면 그대로 꼼짝없이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살짝 편법을 써서 중간에 내린 것이지요.”

   초열? 그건 아까 기차표에서 분명…. 규환, 대규환, 초열, 지옥, 무언가 생각 날 것 같았다. 

   “매번 악몽에 휘둘리시면 안 됩니다. 이겨내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자, 하나, 둘, 셋, …여덟의 눈동자를 기억하시는지요? 어머니와 함께 보러 가려던 ■■을 떠올리세요. 악몽에서 깨어날 시간입니다….”

   뚝, 뚝 끊기는 목소리, 눈 뜨기 어려울 정도로 휘날리는 눈보라에 흐릿하게 형태만 보이는 백란의 모습, 윽, 잠, 깐, 

   한 걸음 떼기도 어려운 눈보라 속에서 마치 평지 위를 걷듯이 뒷걸음쳐 멀어지는 백란에게 겨우 눈보라를 헤치며 다가가, 옷자락을 잡아챘다.

   눈을 마주치려고 고개를 들자,

   한 쌍의,

   붉은.

   아니.

   아니다. 평범한 갈색 눈동자였다.

   다만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흔들림 없이 나를 바라보는 백란의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아닌 듯한……. 

   “기억은 중요합니다. 자신을 인식하기 위한 기본적인 수단이지요.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전부 챙겨 나가셔야 합니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선택하셔야 합니다. 여태까지 늘, 그래왔듯이.”

   백란이 팔을 뻗어 눈보라 속 한 구역을 가리키며 말했다. 

   백란의 말은 마치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 길을 따라가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다만 무엇이 나와도 ———라는 점을 명심하세요.”

   분명 귀로 들었음에도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뭘 명심해야 하는데? 몇 번을 물어도 뒷말은 머릿속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전에도 분명 이런 적이 있었다. 나는 별수 없이 백란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내가 보이지 않는 하나의 점이 되어 갈 즈음까지도, 백란은 그 자리에 서서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모습이었다.

   계속 걷다 보니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나는 어느새 꽃이 가득 핀 너른 언덕에 서 있었다. 언덕 아래로 따라 내려가라는 것인지 길이 하나로 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걸어가자 바람은 부드럽게 나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고,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다. 여기는 어디지?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마을이 보였다. 처음 들어보는 언어를 쓰는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즐거워 보이는 동네였다. 아이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을 무심코 쳐다보니, 커다란 바위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바위 위에 앉은 남자의 어쩐지 얼굴이 익숙해서,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았다.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다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즐거운 노랫소리와 신비로운 분위기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또 어느새 울창한 숲속에 들어와 있었다. 숲에는 거센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내 앞에 놓인 길 위에는 물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어쩐지 해저 터널이라도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기함에 주변을 둘러보면서 걷던 와중, 아주 큰 나무 아래 어떤 어린아이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의 옆에는 사슴 같이 생긴 짐승 한 마리도 함께 비를 피하며 앉아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익숙해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순간 손에 무언가 무게가 느껴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우산이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비를 피하고 있는 아이의 앞에 그 우산을 펼쳐서 내려놓았다. 내 쪽은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라,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우산에 아이는 잠시 놀라더니 이내 우산을 쓰고 빗속을 나아갔다.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도 발걸음을 돌려 길을 마저 걸어갔다. 

   서서히 비가 그쳐갔다. 주변이 제법 어둑해진 느낌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에 별빛이 수놓아진 밤하늘이 보였다. 저게 진짜 은하수야. 누군가 마음속에서 속삭였다. 계속 은하수를 바라보고 있자, 어두웠던 숲속이 갑자기 밝아졌다. 어디선가 반딧불이가 하나둘씩 나타나 숲을 가득 밝게 비추고 있었다. 반딧불이 빛을 등불 삼아 어두운 숲길을 다시 걸어갔다. 그런데 걸어가다 보니 반딧불이 한 마리가 돌연 눈에 띄었다. 힘차게 빛내며 날아다니는 다른 것들과는 달리, 힘없이 비틀대고 있기에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디디고 있는 바닥은, 무척 단단한 것 같아도 금세 부서진다. ■■가 그렇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분명, 함께 이겨낼 수만 있다면, 쫓아낸다면, 언제든지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나는 떨어질 것 같은 반딧불이를 이끌어 나무에 올려주었다. 분명 작은 불빛인데 마치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이끄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사실은 반딧불이가 아닌가? 분명 언젠가 이 빛들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마치 저 밤하늘의 별빛같이 밝은 빛들을, 분명….

   * * *

 

   어느새 또 새롭게 들어서게 된 공간은 가을빛이 완연한 색색의 나무들이 잔뜩 심어져 있는 어느 고등학교 교정이었다. 

   -컹!

   이렇게 넓은 교정을 가진 고등학교가 있었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지척에서 난 짐승의 울음소리에 흠칫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금빛 털을 가진 대형견이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내 근처를 빙글빙글 돌았다. 

   뭐지?

   이렇게 큰 대형견은 자주 본 적이 없는데 어딘가 익숙한 느낌을 주는 개였다. 쓰다듬어 주고자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목에 걸려있는 목줄을 발견했다. 목줄이 작은 모양인지 목을 조이고 있기에 급하게 목줄을 풀어주었다. 개는 고맙다는 표시인지, 내 손을 핥아 댔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앉아서 얌전히 쓰다듬을 받던 개는 갑자기 귀를 쫑긋 세우더니 벌떡 일어났다. 저 멀리서 누군가 개를 부르는 소리를 낸 모양이었다. 주인인가 본지 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손에 남은 부드러운 털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다시 길을 따라 걸었다. 학교 건물 사이사이로 길이 나 있어서 건물을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건물의 창 중 몇 개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있었다. 

   신기하네, 가톨릭 고등학교인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잔잔한 클래식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디서 이 음악이 들려오는 건지 찾아보려 두리번거리다가, 순간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깜짝이야!”

   바닥을 살펴보니 붉은 실타래가 잔뜩 꼬여서 바닥에 놓여있었다. 

   갑자기 머릿속 한 구석이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실을 본 적이 있어. 실을 둘둘 말아 주머니 속에 챙겼다. 학교 정문으로 이어지는 길의 끝에 도착하자, 나는 묘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학생들은 교정을 거닐며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하늘에는 은행잎과 단풍잎이 한데 어우러져 바람에 날리며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맑은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쩐지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서, 무거운 철문을 활짝 열고 길을 따라 나왔다. 환한 빛 속을 통과하자 눈보라 속에서 백란이 당부했던 것이 이제야 기억났다. 

   ‘다만 무엇이 나와도 ‘이미 지나간 과거’라는 점을 명심하세요’ 

   잊고 있던 것이 전부 떠올랐다. 주머니에 넣었던 붉은 실을 꺼냈다. 이 인연의 실이 과거와 나를 이어주고 있었다. 모두 하나의 인연이, 기억이 되어 나를 구성하고 있었다. 악몽으로 재구성된 세계에서 나는 다시 한번 환상열차에서 탈출했다. 도원향에서 행복을 찾은 박 과장을 만났고, 수컷 기린을 데려가는 바보 같은 전생의 자신에게 어느 날의 피투성이 여학생에게 그랬듯이 우산을 건네주었다. 반월당 요괴들과 함께 칠석야에 은하수를 보았던 일, 심사관이 되어 가게 대문을 밝혀 줄 별조각을 골랐던 일, 귀혼술 때문에 고통받던 반장의 개를 구해줬던 일, 공포게임 속에 갇혀 있던 학생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던 것….

   어떤 것은 과거이기도, 혹은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이기도 했으나 모두 내가 과거에 이미 했던 선택과 관련이 있었다. 모든 세계는 하나하나의 선택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굴러간다. 선택해 버리는 순간,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선택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모든 악몽은 이미 지나온 과거였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로, 과거의 나와 약속했다.

   어느새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눈꽃을 보러 가기로 약속했었던 그날처럼.

 

   * * *

 

   깜빡,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집이었다.

   열어둔 창문에서는 더운 바람이 훅 불어 들어왔다. 창밖에서는 매미가 미친 듯이 울어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누워있다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묘하게 물기가 묻어나왔다.

   “꿈이… 아니었네.”

   악몽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나도 그것을 이겨낼 힘이 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기억을 잃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혼자 한 선택이지만, 많은 인연이 그곳에 있었다. 여우가 말한 악몽을 이겨내는 방법이 이거였을까?

   처음에 반월당을 얼떨결에 떠맡게 되었을 때, 여우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져 괜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빈자리가 느껴진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만큼 혼자 고생해 왔다는 의미인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 고생을 다 함께 나눠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도.

   나도, 여우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까. 

   문득 백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악몽에서 깨어날 시간입니다….’

   그 말이 맞았다. 

   이제 나쁜 꿈은 끝났다.

후기

안녕하세요, 살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백란의 ‘이 세계는 위험한 미로라, 다음 모퉁이를 돌았을 때 무엇이 나타날 지 모른다’는 이 대사와, 반월당 2권에서 백란이 유단에게 선택을 하면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운명이 정해진다고 말하는 장면을 정말 정말 좋아하는데요…. 
이렇게 아슬아슬한 선택지 속에서 살아남던 유단이가 외전에 이르러 더 이상 혼자 뛰어들지 않아도 된다고 깨닫는 것을 보고 저는…. 이 부분이 너무나도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외전 마지막에 한 청년의 대사도 그렇고요. 그래서인지 아마 이 글을 쓰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지금 후기를 쓰면서 문득 드네요…. 제 취향을 다 보여드린 것 같아 뭔가 부끄럽기도 합니다….
글로 돌아가서, 부연 설명을 약간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초반에 기차에서 볼드체로 적힌 대사들은 유단의 마음 속 소리기도 했지만 동시에 악몽의 속삭임이기도 했습니다. 유단이 상황을 의심해 기차를 벗어나지 않도록, 마치 세뇌처럼 속삭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적게 되었습니다. 
합작에는 도대체 무슨 작품을 써야 하나 걱정이 많아 수많은 후보군을 수도 없이 붙잡았다가 버리기를 반복했는데, 최종적으로 무언가 완성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주최님과, 이 글을 읽어 주신 분들께 무한한 감사 인사를 전하며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

<반월당의 기묘한 이야기> NCP 팬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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