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 미로
졸라맨 | @8t3d7
도망쳐. 당장 피해야 해! 생존 본능이 경고했다. 마음의 소리를 따라 달아났다. 하지만 벗어나려 할수록 '그것'은 유단에게로 점점 가까워졌다. 유단은 도망치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유단 자신도 알 수 없었으나, 아주 불길한 재앙이었다…….
* * *
여기가 어디지? 유단이 힘없이 꺾여 있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신은 달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어진 건지 모를 뜀박질에 폐가 터질 듯이 가빠져왔다. 산소를 들이마시자 흐릿하던 정신이 선명해졌다.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살펴보았다. 익숙한 길거리다. 손에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자신은 지금 케이크 상자를 쥐고 있고, 이어지는 소맷단을 보아하니 교복 차림이었다. 그리고…
유단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피할 수 없이 불길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런 빛도 투과되지 않는 오 미터가량의 새까만 구멍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들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구멍은 액이었다. 유단이 사악한 요괴에게 속아서 잘못 깨뜨려버린 구슬에서 발생한 액. 그건 반월당 요괴들과 유단이 해결했을 텐데, 어째서 지금? 유단은 자신의 손등을 꼬집었으나 통증은 선명했다. 우선 꿈은 아니다. 아무래도 괴이에 단단히 홀린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이 상황에서 탈출해야 한다. 혹시나 싶어 도깨비 뿔을 불러보았지만, 도깨비 뿔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공간이야? 유단이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불만을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 그때는 유단과 꼭 닮은 제웅을 만들어 제물로 바치려 했는데, 제웅이 멋대로 유단의 머리카락을 먹어버려 실패했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액을 없앨 방법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의 목숨이 희생되어야만 한다. 과거 액을 해결했던 방법은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애초에 당시 액이 본인에게 씌었던 건, 그 때의 내가 진실한 마음이었기 때문이야. 액을 이해하고 공감했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불가능해. 괜한 목숨만 버리겠지.’
반월당 요괴들과 처음 만나게 된 계기가 되어준 괴이였다. 반월당에만 들어가면 살 수 있다.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요괴들이랑 지낸 기간이 길어진 만큼 과거의 일은 흐릿해졌다. 유단이 미아의 전언을 되새겼다.
“분명 뛰면 안 된다고 했고, 빠른 걸음으로….”
길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수 없이 들락거린 기묘한 상점은 머리보다도 몸이 더 익숙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 * *
[半月堂]
익숙한 현판이 유단을 반겼다. 예의를 차려야 할까? 또 요괴들의 위협을 받을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또 백란에게 고개를 숙여야 해? 자존심이 상하는 와중에도 액은 서서히 유단에게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은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이제 흑요의 칼이 유단의 목을 반겨줄 것이다. 유단이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각오했던 위협은 없었다. 다만 우당탕탕 번잡한 소리가 나더니, 가게 안에서부터 요괴들이 우르르 뛰쳐나오는 것이다. 그 백란마저도 버선발로 달려 나와(다소 과장되었다.) 유단을 맞이했다.
“왜 이제 오십니까?!”
“왜 이제 왔어?”
그리고 유단을 책망했다. 정제되지 않은 항의가 속출했다. 요괴들이 대체 무슨 일이지? 그보다 나만 이 괴이에 빠진 게 아니었던 건가? 이 시점에서 유단과 반월당 요괴들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생판 초면이었다. 그런데 요괴들이 유단을 알아본 것이다. 유단은 벙벙해진 어안을 붙들고 요괴들에게 되레 따졌다.
“왜 이제 오냐니! 나도 정신을 차리자마자 반월당으로 달려온 건데. 내가 한눈팔고 천천히 온 거였으면 난 이미 죽었겠지!”
유단은 그렇게 말하고는 유단의 뒤에 열려있는 액 구덩이를 가리켰다. 불길한 낌새는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역시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저것 좀 봐. 그때 그 액이야.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자리를 피하죠. 저것에 계속 노출되어서 좋을 게 없으니…. 자세한 건 들어가서 설명하겠습니다. 따라오세요.”
백란이 모두에게 손짓했다. 유단은 백란을 따라 낡고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랐다. 익숙한 서재에 들어서니 그제야 반월당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유단이 경청하는 가운데, 백란이 입을 열었다. 백란이 꺼낸 말은 지금까지 웬만한 이상 현상과 괴이에 익숙해진 유단에게도 제법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당신이 오기 한참 전부터 우리는 똑같은 하루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무얼 시도해도 계속 오늘 아침으로 되돌아왔죠. 하루를 넘길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가 우리를 가둔 겁니다.”
“뭐? 우리가 갇힌 거라고? 그러면 탈출 방법은? 너도 몰라?”
당황스러움에 질문이 계속 튀어나왔다. 그런 유단보다는 조금 더 진정된 상태의 채설이 유단의 질문을 받아 답변했다.
“처음에는 우리도 자각하지 못했어.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거야. 이미 해본 적 있었던 일을 계속 반복하는 것 같은 기묘한 기시감이….”
“그리고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곧 올 거라는 예감도 들었고요. 그런데…”
“네가 오지 않는 것이다. 자고 일어나도 날짜는 그대로인데!”
“흑요 누님, 지금 굉장히 예민하세요. 보던 드라마가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에서 끊겼거든요. 하필 이 시간대에는 아직 안 나온 부분이지 뭐예요….”
“이 상황을 만든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고작 액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들과 처음 만났을 때는 죽을 각오를 불사하고 액에 뛰어들어서 잘도 해결하셨죠?”
백란이 유단을 보고 웃었다. 꿍꿍이가 있는 듯한 사악한 미소였다. 이어질 백란의 말이 예상된다. 뒷말은 들어볼 필요조차 없었다. 분명 용감하게 뛰어들어 보라느니…, 유단을 놀리기나 할 것이다. 유단은 백란의 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장난치지 말고!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을지 알고 있잖아? 또 날 놀리느라 안 알려주는 거지?”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눈치가 조금 늘어난 것도 같고요?”
“맞습니다. 이 정도면 사람 다 되었지 않겠습니까?”
“내가 사람이 아니면 뭐였길래?”
“천둥벌거숭이. 사고만 치는 골칫덩이를 그렇게 부르곤 하지.”
백란이 ‘조금’에 강세를 두어 말했다. 그 농담을 흑요가 받아쳤다. 언제쯤 유단 약 올리기를 그만둘까? 인간이 아닌 요괴들이라 시간감각이 이상한 것 같았다. 아마도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도 트집을 잡아 골려 먹겠지. 그리고 열을 내는 유단을 보며 비웃을 것이다. 이제 슬슬 그들의 화법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요괴들의 매도가 없으면 허전할 지경이었다. 이런 속내를 백란에게 이야기하면 더 많은 비웃음으로 돌아오겠지만…. 유단이 생각했다.
유단이 생각하느라 말이 없으니 유단을 놀리느라 달아오른 분위기도 소강상태가 되었다. 백란이 입을 열었다. 이 상황을 따져 추론한 합리적인 의견으로, 평소의 백란처럼 논리적인 내용이었다.
유단이 휩쓸린 건 차치하고, 반월당에 거주하던 요괴들이 반월당의 과거에 갇혀버린 건 내부의 어떤 문제 때문이다. 우선 반월당 내부에서 바깥으로 서서히 범위를 넓혀 조사하면 단서가 나올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유단의 액에 대해서도 한번 꼬집어 말했다.
“당신의 액은, 액을 억누르는 강력한 부적을 이용할 겁니다. 이 상황이 길게 지속된다면 문제가 되지만, 우리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 액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갇히게 된 진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이해하셨죠? 그럼 움직이세요!”
* * *
이것이 유단과 반월당 요괴들이 반월당 내부의 물건을 샅샅이 조사하게 된 이유였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광활한 각각의 방들은 심부름이든, 반월당 건물이 유단을 골탕 먹여 갇혔기 때문이든 자주 들어와 익숙했다. 그러나 방 안에서도 그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한번 뒤지고 보자니 새로운 도구가 끝도 없이 튀어나왔다. ‘이런 게 존재한다고?’ 싶은 괴상한 물건들이 가득하다. 이런 게 존재했다. 유단은 반월당이라는 공간의 적재력에 대해 고찰하다, 옆에서 튀어나온 감탄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우와, 다들 이것 좀 보세요!”
“뭐야. 뭔가 찾은 거야?”
“아뇨, 그건 아니고요…. 지난번 새 요괴님께 드렸던 나침반이 여기 있어요. 과거 시점으로 돌아와서 물건도 그대로 남아있는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신기하네요.”
돌아갈 방법에 대한 단서를 찾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단은 갑자기 맥이 빠져 주변을 돌아보았다. 단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앞만 보고 파고들었는데, 그렇게는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유단의 눈에 충격적인 장면이 들어왔다. 채설, 흑요, 도씨…. 반월당에 깊숙이 잠들어 있던 물건들을 보고 감상에 빠진 건 채우 뿐만이 아니었다. 유단을 제외한 모든 요괴들이 방 안 물건에 담긴 추억을 회상하고 있었다. 심지어 백란까지도…. 유단은 그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요괴들에게 일갈했다.
“정신 차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다들… 어?”
유단의 발뒤꿈치에 무언가가 채이는 느낌이 들었다. 유단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특별한 점 하나 없는 시계가 발치에 나동그라져 있음을 깨달았다. 위를 덮은 유리판이 아주 투명해서 시계를 바라보는 유단의 모습이 훤히 비추었다. 평범한 시계다. 그러나 동시에 미심쩍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유단은 자신의 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으로 시계를 집중해 쳐다보았다. 유단의 눈이 일순 빨갛게 불타오르며,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계를 비추고 있었다. 여타 시계와 다른 것은, 시계 초침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유단은 조금 더 집중해서 거울 표면을 꿰뚫어 보았다. 시침이 일렁거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상을 보여주었다. 반월당이었다. 잠들어 있는 요괴들의 모습이 보였다.
“갇힌 건가…? 다들 정신 차려! 일어나!”
유단이 거울을 향해 소리쳤으나 그 누구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유단을 요괴들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군댔다. 말소리는 결코 작지 않아, 유단에게도 충분히 들릴 정도였다.
“쯧…, 이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미쳐버린 게 틀림없습니다.”
“괴이에 홀린 게 아닐까요?”
“저길 봐. 수상해 보이는 거울을 들고 있어!”
‘요괴들의 목소리…?’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 이 거울 속에서는 모두 다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잠든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유단은 번뜩 정신이 들어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유단의 주변을 요괴들이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걱정하는 것 같기도, 비웃는 것 같기도 한 모양새였다. 그 잠깐 사이 심력을 소모했는지 유단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소리를 지르시고요. 귀청이 다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지 뭡니까?”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안다니 다행이네요.”
“거울 속에 이상한 게 보였어. 장소는 반월당이었고, 너네가 전부 잠들어 있었어. 그래서 난 그게 현실인 줄 알고…….”
“잠시만,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처음엔 평범한 시계인 줄 알았어. 시곗바늘이 보였거든. 그런데 뭔가 수상해서 지켜봤는데 초침이 거꾸로 돌고 있는 거야. 그래서 천안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니까…”
“사실 시계가 아니라 거울이었겠죠.”
“어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백란은 유단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놓았다.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겠습니다. 우리는 거울 속에 갇힌 겁니다. 아주 복잡하게 일그러져서 그 자체로 하나의 미로가 된 거울이요.”
백란이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저것이 시계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선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시계를 제 방향으로 돌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백란이 문제의 그 물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 분명 거울이 되었는데…. 유단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발치를 바라보았다가 흠칫했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거울은 다시 평범한 시계 모양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저게 시계라는 거지?”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를 원래 방향으로 돌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유단은 고민하다 한 가지 묘책을 생각해 냈다.
“아! 이건 어때?”
“그 방법이라면….”
유단이 제안하고 백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거울을 양옆으로 마주 보게 대면 시계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거울은 물건을 뒤집어서 보여주니까.”
이것이 유단이 제안한 해법이다. 다만 괴이의 기운을 버텨야 하기 때문에, 평범한 거울로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공간은 반월당이다. 평범한 거울보다 평범하지 않은 거울이 더 많은 보물 창고였다. 요괴들은 창고 어딘가에서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청동 거울을 가져와 시계 앞에 가져다 댔다. 거울 하나를 더 가져와 시계 맞은편에 두면 끝인 간단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효과는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시계가 돌아간다.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를 비추는 거울을 비추는 거울이 보인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거울끼리 마주 댄 영원히 이어지는 통로 속에서 악한 기운이 조금씩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체를 갖춘 그것은 괴이라기보다도 악귀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명백한 악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단순 무식한 방법이 통하기도 하는군요…. 방법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 완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바보라서 생각할 수 있었던 방법이겠지요.”
“에이, 흑요 언니. 유단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봐봐, 오늘도 멋지게 활약했잖아?”
그러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농담을 주고받으며 유단을 매도할 정도였다. 유단도 일순 긴장했다가, 요괴들의 가벼운 태도에 한 줌 남겨둔 긴장을 내려놓았다.
“자, 이제 해치워볼까요? 진짜 반월당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백란이 자신의 꼬리를 닮은 창을 꺼내 들고 말했다. 명색이 천호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니 금방이라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단도 질 수 없었다. 이렇게 짐이 될 수 없다고 간절히 생각하니 손에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괴이를 해결해 오며 다른 무엇보다 익숙해진 고대의 도깨비 뿔이었다.
‘살았다!’
유단은 자신감을 얻고 악귀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요괴들도 악귀를 둥그렇게 둘러싸 포위했다. 유단은 백란과 눈이 마주쳤다. 계획을 눈빛으로 전달받았고, 유단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백란은 혼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는 혼자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신의 요력으로 황금빛 사슬을 뽑아내는 것이 보였다. 반대 손에는 부적을 쥐고 있었다. 분명 사슬로 묶고 부적으로 행동할 수 없게 만들 심산이었다. 우리는 백란이 계략을 실행할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악귀가 달려들었다. 흑요가 검을 뽑아 베어냈으나, 형체가 사라지고 이내 다시 모여 하나가 되었다. 흑요가 소리쳤다.
“형체가 없는 괴이입니다, 천호님!”
“알고 있습니다. 사슬로 속박함과 동시에 물리력을 부여하는 부적을 사용할 겁니다.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전투는 지지부진했다. 유단이 도깨비 뿔을 휘둘러도 잠시 주춤하는 듯하더니 다시 모여들었다. 칼로 베어도, 요력을 사용해도 마찬가지였다. 체력이 닳고, 시간이 지나갔다. 그들은 서서히 지쳐갔다. 그러던 그때….
“지금입니다. 다들 물러서세요!”
백란이 외쳤다. 아까도 밝았던 사슬이 더욱 찬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악한 것을 구속하고 싶다는 듯 천기天氣마저 띠고 있었다. 사슬이 악귀를 향해 쏘아졌다. 사슬로 악귀를 속박함과 동시에 부적이 날아가 붙었다. 그들을 괴롭히던 악귀가 손아귀 안에 들어왔다. 방심하고 있었던 듯, 한번 덜미를 잡히고 나니 큰 저항은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괴이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괴이는 생전의 자아가 남아있는 원념이 아닌,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모인 찌꺼기에 가까웠다. 누군가를 가둬서 해치기 위해 안달 나 있었다. 사연이 없다면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가 없다. 그 이후로는 순조로웠다. 유단과 요괴들은 악귀를 무자비하게 폭력으로 다스렸다. 악귀는 맥도 추리지 못하고 소멸했다.
* * *
“이제 이 거울을 완전히 깨뜨리면 됩니다.”
괴이의 힘이 사라진 거울은 평범하게, 어떻게 보면 초라하게도 보였다. 유단은 거울 표면에 도깨비 뿔을 대고 찍어 눌렀다. 거울이 깨질 정도로는 누르지 않았는데, 도깨비 뿔이 닿자마자 검은 금이 가더니 표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천호님, 빨리 돌아가죠. 할 일이 많습니다.”
“이제 돌아갈 수 있어…! 흑요 언니랑 드라마 마지막 회차를 남겨두고 있었는데, 이 시점에서는 아직 방영되지 않았단 말야! 정말,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거울이 깨지며 세계가 산산조각 났다. 눈을 감았다 뜨니 유단은 반월당이 아닌 제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혼자만 반월당이 아니라 집이라서 내가 거울 속 세계에 늦게 들어왔던 걸까? 애초에 그 장소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휘말린 거지? 모든 상황이 해결되자 쓸데없는 의문이 올라왔다. 닫힌 창문에 유단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콜록. 유단은 매캐한 연기를 마시고 기침을 하며 생각했다. 매캐한 연기?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아! 내 계란 프라이가!”
프라이팬에 올라간 계란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유단은 급히 불을 끄고 가스 밸브를 잠갔다. 오랜만에 집에서 밥을 해 먹으려니까 무슨 날벼락인지. 유단은 물을 받아 달궈진 프라이팬을 대충 집어넣고 반월당으로 향했다. 반월당 때문에 이 사단이 났으니 밥이라도 얻어먹어야겠다. 유단이 생각했다.
후기
캐붕도 설정 오류도 그 무엇도 피할 수 없었지만, 모쪼록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충동적으로 합작을 신청하면서도 완성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지만 닥치면 하게 되네요. 합작을 공개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이만 성불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