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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종
하하하      |     @ha_ha_haha03

   유단이 알기로 이런 말이 있다. 

   아카시아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활짝 열어둔 창가에서 은은하게 불어오는 아카시아의 향기를 맡으며 유단은 다소 낙담적인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제 고등학생 2학년. 훗날 내신을 생각하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1학기 중간고사를 망쳐버린 것이다.

   제아무리 괴이를 해결하는 일에 바빴을지언정 공부를 아예 놓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함정인가? 생각될 정도로 시험이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웠던 탓이었다. 혹시 나만 망한 건가? 생각하며 주의를 둘러보자 다행히 유단만 그런 것은 아닌지 눈에 띄게 어수선해진 교실 분위기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지금 가채점 해봤자 기분만 망칠 것을 직감한 유단은 시험지를 서랍에 잘 쑤셔 박아놓고는 창가나 보며 멍을 때렸다. 뒤늦게 공부를 더 할 걸 후회해봤자 이미 망한 건 망한 거였다.

   처음부터 아주 잘 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사실을 받아드리는 것은 쉬웠다.

   대학에 못 가게 되어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이미 어떤 여우가 무책임하게 가게를 떠맡긴 탓에 반월당의 부동산은 유단의 앞으로 되어있었다. 따지고 보면 일단 이것도 자영업자 아닌가?

   비록 이번 달 내야하는 세금도 간당간당했지만, 꿈에도 그리던 평범한 삶도 창밖의 저 벌처럼 훨훨 날아가는 것 같았지만… 유단은 애써 무시했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자니 붕붕 날아가던 꿀벌이 두 발로 서서는 하얀 꽃이 피어있는 나무 곁에서 서성이는 게 보였다. 이족보행을 하잖아? 자세히 보니 벌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벌이 아니었다. 자기가 생각한 곳에 착지한 것은 아닌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참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애초에 날아서 갔으면 됐잖아. 왜 내려간 거야? 힘이 빠졌나?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조금 더 자세히 보려는데 종소리와 함께 들어온 담임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제 그만하고 자리에 앉자.”

   아, 중간고사도 이제 끝났구나. 무심코 벽에 붙어있는 시계를 보니 시침이 딱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유단은 시계에서 시선을 떼고 힐끗 평소보다 해가 높게 떠있는 하늘을 보았다.

   망한 시험만큼이나 쾌청한 날씨였다.

   

   *

   

   결과가 어찌됐건 중간고사도 끝났겠다 집에도 들리지 않고 바로 반월당으로 왔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직 대문도 넘지 않았건만 반월당 안에서 나온 작은 요괴들이 제각기 손에 뭔가 들고 나르며 바삐 움직이는 게 보였다.

   “뭐가 이렇게 어수선해?”

   모종삽, 꽃병, …바나나? 

   대체 뭐지? 

   각기 다른 물건을 들고 나가는 요괴들을 힐끗거리며 대문을 넘자 생각지도 않은 답변이 앞에서 들려왔다.

   “오늘이 망종芒種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물을 뿌린 듯 싱그러운 빛을 뽐내는 마당에서 여우가 유유히 걸어 나왔다.

   저 방구석 폐요가 웬일이지? 평소에는 건물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으면서.

   유단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보자 여우가 싱긋 미소 지었다.

   “오늘 시험은 어떠셨습니까?”

   마중이라도 나온 것처럼 걸어 나오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만.

   “웬일로 나와 있나 했더니. 보자마자 바로 시비야?”

   “평소 행실을 생각해서 다음 시험은 잘 보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위로를 드려야 할지,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그랬냐 충고를 드려야 할지 고민하다 그래도 결과를 묻기는 해야 할 것 같아 그랬습니다만. 시비로 느껴지셨다니, 역시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위로를 먼저 해드리는 게 나았겠군요. 다음부터는 참고 하겠습니다.”

   “다음 시험도 망하라는 소리야?”

   유단이 발끈하자 백란이 대꾸했다.

   “역시 시험을 망친 건 맞다는 거군요.”

   역시 놀리려고 나온 거였다.

   유도심문에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잘 쳤을 거란 생각도 없었을 거면서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백란의 모습에 약이 올랐지만, 유단은 지금까지의 경험상 이 대화를 길게 이어나가면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일 것을 알았다. 이 패턴에 한 두 번 속은 것이 아니었다.

   “됐어. 그것보다 망종이 뭐야? 아까 망종이라서 다들 바쁘다는 식으로 얘기했잖아.”

   충분히 놀린 건지 유단의 빤한 말 돌리기에도 지적하지 않은 백란이 느긋한 몸짓으로 마당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라는 건가 싶어 유단이 잠자코 뒤따랐다.

   앞서 걷던 여우가 말했다.

   “아무리 요즘 청소년들이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춘분(春分)이나 하지(夏至) 같은 건 한 번 쯤 들어보셨겠지요? 요즘 들어서는 익히 쓰지 않지만 망종 역시 24절기 중 하나입니다. 벼나 보리 같은 곡식의 씨앗을 뿌리기 좋은 때라는 뜻이지요. 예로부터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먹게 되니 망종이다 하였습니다.”

   백란의 설명은 걸음처럼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씨를 뿌리는 시기라는 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따라가던 유단이 물었다.

   씨는 보통 봄에 뿌리지 않나? 잘 모르긴 해도.

   듣지 않아도 그 머릿속이 훤하다는 듯 백란이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봄에 자란 햇보리를 모두 베어내어 빈터에 벼를 심는 시기입니다.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망종까지는 보리를 모두 베어야 논에 벼를 심고 밭갈이를 할 수 있었기에 생긴 말이었습니다. 농부들에겐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기도 했지요. 오죽하면 ‘망종에는 발등에 오줌 싼다’라는 표현을 다 썼을까요.”

   “발등에 뭐라고?”

   잘못 들은 줄 안 유단이 되묻자 백란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듣기에 다소 적나라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자리를 비울 수 없을 만치 바쁜 경우에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 상식은 초등학교에서 배울 텐데요.”

   그런 말이 다 있냐는 듯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단의 얼굴을 백란이 한 번 힐끔 보았다.

   “제가 바보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했군요.”

   무시하는 투의 말에 발끈한 유단이 투덜거렸다.

   “잘 안 쓰는 속담은 좀 잊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짝이군요. 더 설명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아니.”

   단박에 그건 아니라고 부정하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흘겨보던 여우가 다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여간에 망종은 보리의 수확을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옛날에는 쌀이 지금보다 귀했기 때문에 보리를 언제 수확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그 해 망종이 언제 드느냐에 따라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었죠.”

   “그거랑 다들 안 보이는 거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건데? 다 같이 모내기라도 하는 거야?”

   “모내기라, 어찌 보면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비슷한 거면 비슷한 거지 아닌 건 또 뭐지? 

   유단은 머쓱해졌지만 백란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망종은 밭갈이를 하듯이 하던 일을 마치고 새 일을 시작하거나 새로 마음을 가다듬기에도 좋은 시기입니다. 또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이기도 하고요. 이것이 다들 아침 일찍부터 분주히 움직인 이유입니다. 올해도 무사히 여름을 나야하니까요. 작년에는 이 시기에 방문하지 않아 미처 보지 못하셨겠지만.”

   유유히 느긋한 발걸음으로 앞서가던 백란이 멈춰서 한 발 비켜서자 예전에 보았던 도씨의 밭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쌍둥이가 보였다. 

   “어!”

   호미를 들고 뭔가 하던 채설이 고개를 들었다가 유단을 발견하고는 반가움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옆에서 뭘 헤아리고 있던 채우도 고개를 들고 반갑다는 듯 눈인사했다. 비슷하다더니 진짜 밭을 메고 있었잖아.

   이걸 보여주려고 한 건가? 옆을 힐끗 보니 평소와 같이 새침한 표정으로 있는 백란의 모습이 보였다.

   유단을 보고 상기된 얼굴로 뛰어온 채설이 말했다.

   “오늘은 일찍 왔네! 웬일이야? 오늘이 시험이라고 했던가?”

   “어, 너네도 여름 준비하는 거야?”

   혹시나 시험점수에 대해 물을까 싶어 급하게 말 돌린 거였지만 다행히 크게 개의치 않은 채설이 손에 묻은 흙을 탁탁 털었다.

   “오면서 천호님한테 들었구나? 맞아! 잡초를 뽑고 여름에 날 꽃이랑 모종을 심고 있었어. 식물은 자주 들여다보지 않으면 금방 무성해지거든!”

   “뭘 심었는데?”

   유단이 궁금해 하면서 고개를 들이밀자 채우가 손으로 헤아리던 비단 주머니를 일렬로 펼쳤다. 살짝 들추니 각각 다르게 생긴 씨앗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오늘 심은 애들이에요. 여기서부터 봉선화, 금송화, 금잔화, 백일홍…….”

   채우의 설명을 들으며 까만 들깨나 작은 환 같은 것을 보니 초등학교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진짜 씨앗이니까 당연했지만. 그땐 이런 걸 표본으로 만들어서 흰 도화지에 붙여 씨앗마다 이름을 적기도 했었는데. 열심히 붙이고 적고 한 것에 비해 뭐가 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유단이 씨앗을 보고 식물의 이름을 유추할 수 있는 거라곤 강낭콩이나 해바라기가 전부였다.

   뿌린 씨앗의 종류를 가만히 듣던 유단이 불현 듯 물었다.

   “백일홍도 여름 꽃이야?”

   딴엔 평범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의외라고 생각했던 건지 여기저기서 반응이 튀어나왔다.

   “유단이가 백일홍도 알아?”

   채설이 깜짝 놀라 물었고,

   “뭘 알고서 물었을 리가 없습니다. 평소 행실을 보아 아는 꽃 이름이라고는 장미나 해바라기 정도인 유치원생과 수준이 크게 다를 리도 없을 텐데요. 분명 게임이나 만화책 같은데서 나오니 궁금해진 걸 겁니다.”

   백란은 노골적으로 코웃음 쳤다.

   “백일홍은 여름을 대표하는 꽃 중 하나죠! 100일 간 피어서 백일홍이라고 해요. 식물에 관심이 생기신 것 같아 기쁘네요! 지금부터 백일홍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드릴까요?”

   그 중 동자삼 소년만이 눈을 빛내며 유단의 말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유단이 백일홍을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이렇게 신용이 없다니.

   “다들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나도 알고 있는 꽃 정도는 있다고.”

   “어떻게 생긴 지는 아십니까?”

   유단이 억울해하자 백란이 물었다.

   “그것도 모르고 물었을까? 빨갛고 동그랗고 숱 많은 꽃이잖아. 도로 옆에 피어있는 거.”

   자신만만하게 설명하자 모두가 놀랐다.

   “나 깜짝 놀랐어! 유단이가 정말 무슨 꽃인 줄 알잖아? 우리가 유단이를 너무 무시했나 봐. 그렇게 식물을 사랑하는 줄 모르고… 나는 정말 나쁜 동자삼이야.”

   “그러게요. 분명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유치원생에서 초등학생으로 바꿔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등학생이거든?”

   유단이 정정했다.

   세 요괴가 정말 별 일이라는 듯이 유단을 쳐다보자 화가 나기보다는 그냥,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바보취급 당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불현 듯 인생에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무식해 보여?”

   유단이 허탈하게 말하자 채설이 깜짝 놀라 부정했다.

   “아니야! 무식해 보인다기보다 유단이는 꽃이라곤 벚꽃이나 해바라기 밖에 모를 것처럼 생겨서 그래.”

   “뭐?”

   “선물이랍시고 꽃을 주는 행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처럼 생겼죠.”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모르는 꽃이 많다는 건 알아갈 꽃도 많다는 거잖아요! 매일 하나씩만 알아도 금방 남들보다 많이 알게 될 거예요.”

   결국 그게 멍청해 보인다는 소리 아닌가?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꽃에는 관심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말 같았다. 솔직히 유단이 생각하기도 저 말들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꽃에 관심이 없는 건 맞았으니까.

   쌍둥이 사이에 껴서 너무 속상해 하지 말라는 둥, 입 다물고 있으면 전혀 무식해보이지 않는다는 둥 욕인지 위로인지 모를 소리를 듣고 있는데 홀로 떨어져 있던 백란이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나 잘 알면서 왜 백일홍이 여름에 피는 꽃이라는 간단한 사실도 모르십니까?”

   순간 유단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것도 그렇네? 백란의 말을 들은 쌍둥이의 표정에 그렇게 쓰여 있는 것 같았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해명해보라는 시선이었다. 

   추궁하는 게 셋이나 되니 대충 얼버무릴 수도 없었다.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유단이 실토했다.

   “옛날에 도로에 핀 게 백일홍이라고 누가 알려줬어. 그걸 좋아한다고 했거든.”

   순간 정적이 흘렀다.

   …좋아한다고 했다는 말은 뺄 걸 그랬나?

   말하고 보니 괜한 소리까지 함께 한 것 같았다. 유단이 후회하는데 서로의 팔이 닿을 정도로 찰싹 붙은 쌍둥이가 속닥거렸다.

   “저 반응 좀 보세요. 분명 보통 상대가 아닐 거예요.”

   “보통 상대가 아니면 어떤 상대? 혹시 첫사랑인 걸까? 어쩜 좋아!”

   채설이 발그레한 뺨을 감싸며 작게 꺄아하는 소리를 냈다.

   “저 성격에 첫사랑이 있을 런지도 좀 의심스럽지만요.”

   동자삼 쌍둥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여우도 동참하듯 속삭였다. 상기된 얼굴로 상대를 유추하는 둘과 달리 그냥 욕을 하고 싶었던 것뿐인 것 같지만.

   문제는 당사자가 코앞에 있다는 점이 흠이었다.

   “다 들리거든? 첫사랑일 리가 없잖아! 애초에 난 첫사랑도 없….”

   유단이 새빨개진 얼굴로 외치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급하게 뒷말을 흐렸지만 이미 모두 들을 만큼 들은 후였다. 이 말은 하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동자삼 소녀가 호들갑을 떨며 목소리를 죽이며 외쳤다.

   “들었어? 첫사랑도 없대!”

   “그럼 누구에게 들었다는 말일까요?”

   더 상기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는 쌍둥이를 보며 유단은 이마를 짚었다. 할 일 없는 요괴들에게 얘깃거리를 준 내 잘못이었다. 

   유단이 이제 포기한 것처럼 말했다.

   “엄마야. 말해준 사람.”

   “…….”

   유단의 말을 듣자마자 채설의 얼굴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미, 미안.”

   “죄송해요. 저희가 괜히 들떠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줬을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쌍둥이를 보며 유단이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나도 사과하라고 한 소리 아니야. 그냥 굳이 감출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말한 거지. 나는 그게 여름에 나는 줄도 몰랐거든. 그냥 꽃 이름을 들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유단은 덤덤했지만 채설의 안색은 여전히 톡 치면 기절할 것처럼 핏기 하나 없었다. 놀래 킬 생각은 없었는데 깜짝 놀란 것 같아 도리어 이쪽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눈에 띌 만큼 풀이 죽은 채설이 유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정말 미안해, 유단아. 상처주려고 한 말이 아니었어. 사과의 의미로 이걸 줄게.”

   말랑한 고사리 손으로 유단의 손을 쥔 채설이 손바닥 위에 뭔가 쥐여 줬다. 막 품에서 꺼낸 듯 묘한 온기를 머금고 있는 주머니였다. 주머니의 색깔은 레몬 속살이 생각나는 연노랑 빛깔이었는데, 얇은 천 너머로 손안에 걸리는 감촉으로 봐서는 작고 단단한 뭔가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이게 뭔데?”

   “땅에 심기만 하면 쑥쑥 자라는 씨앗이야.”

   “뭐?”

   순간 유단은 머릿속에서 어릴 적에 재밌게 읽었던 잭과 콩나무를 떠올렸다. 쑥쑥 자라는 씨앗? 몇 백 년 묵은 동자삼요괴가 준 씨앗이라니. 자란 식물에서 하늘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유단이 뭔가 키우는 것에 파멸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난 식물을 제대로 키워본 적 없는데…. 집에 있는 멀쩡한 식물도 죽이는 판에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건가? 

   유단이 머뭇거리자 채설이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제발 받아줘, 유단아. 아니면 미안해서 오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거야.”

   “본인도 반성하고 있으니 받아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보다 못한 백란이 한 마디 끼어들었다. 

   솔직히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유단이 생각하기에 굳이 이럴 것도 없었다. 하나같이 놀리려 들기에 조금 발끈하긴 했지만, 저렇게 미안해 할 정도의 일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들이 봤을 땐 아니었던 걸까? 어떻게 자신이 보였길래?

   “애초에 미안해할 일도 아니었다니까.”

   작게 투덜거린 유단이 보드라운 주머니를 슬쩍 열어보며 물었다.

   “그냥 심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 말에 그제야 반색한 채설이 웃어보였다.

   “응! 그냥 둬도 잘 자랄 거라 특별히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

   어쨌거나 선물을 받았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는 순간 채설이 백란에게 다가가 유단이 자신의 사과를 받아줬다고 말하는 게 보였다.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애매해졌다. 

   씨앗을 바지 주머니에 잘 넣고 있으니 채우가 슬쩍 와서 말했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사죄라고는 뭐하지만 그 가실 때 씨앗 심으실 화분은 제가 챙겨드릴게요.”

   팔자 눈썹이 된 채우를 보며 유단이 얼굴을 찡그렸다.

   “사과는 이제 됐다니까. 그리고 아깐 미처 못 물어봤는데 이건 대체 무슨 씨앗이야?”

   유단이 질색하며 말 돌리는 것에 채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심으면 원하는 꽃이 피는 씨앗이에요.”

   “원하는 꽃?”

   “네. 직접 심어보면 아시게 될 거예요. 자자, 저기 채소 모종도 있어요! 가서 구경해 봐요.”

   어리둥절하게 있는 유단을 채우가 등 떠밀었다. 백란과 채설은 먼저 가있었다. 

   텃밭 앞에 이슬이 맺힌 식물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는데 무척이나 싱싱해보였다. 기운을 찾은 채설이 씩씩하게 설명했다.

   “여기부터는 토마토랑 옥수수, 콩, 고추 모종이야. 오늘 심으면 7~8월쯤엔 모두 자라서 먹을 수 있게 될 거야.”

   지금이 5월인데. 꽤 빨리 자라는 구나. 그런데 둘이 하기엔 꽤 양이 많아 보이는데.

   “그런데 나머지 둘은 어디 갔길래 너희만 일 해?”

   “미리 갈아둔 밭에 심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서요. 식물을 심는 일은 저희가 가장 잘 하는 일이죠! 식물들도 그 편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요. 두 분은 다른 일을 하고 계세요..”

   “뭐하는데?”

   유단이 묻자,

   “언니는 오늘 이불 빨래랑 부엌을 청소한다고 했고, 아저씨는 오늘 수확한 햇보리랑 있던 쌀로 누룩을 빚고 있어. 그 술은 망종 당일에 담가야 맛이 좋거든.”

   채설이 대답했다. 은근히 편집증이 있는 구렁이야 대충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이미 만들어 둔 술이 있는데 또 술을 담을 수 있지? 현재 도씨가 공들이고 있는 술독 중 유단이 알고 있는 것만 해도 다섯 가지가 넘었다. 

   “또 술이야?”

   유단이 질린다는 듯 투덜거리자 뒤에서 버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술이라니!”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평소와 달리 소매를 걷은 도씨가 한 손으로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등장했다. 허리가 안 좋은가? 

   “망종에만 빚을 수 있는 이 특주를 만드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렇지 않습니까, 천호님?”

   “확실히 1년에 딱 하루 동안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희소성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백란이 대답했다.

   “역시! 그것 봐봐라.”

   “그렇더라도 술은 이제 슬슬 줄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도씨가 천군만마를 얻은 양 으스댔지만 금방 여우의 말에 꺾이고 말았다.

   “그렇다는데?”

   유단이 돌아보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환했던 도씨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어진 게 보였다. 백란이 덤덤하게 말했다.

   “건강 생각하실 때도 되셨습니다. 보십시오. 또 허리가 안 좋아지시지 않았습니까.”

   얼음땡 놀이를 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도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유단은 소름이 끼쳤다.

   “천호님도 참. 절 걱정하셨다는 말을 그렇게 하시고. 물론 건강은 신경 쓰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 도운룡! 아직 멀쩡합니다!”

   도씨가 허리를 쭉 펴고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을 취하자 우드득하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도씨의 허리로 향했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도씨를 보던 백란이 휙 고개를 돌렸다.

   “알아서 하시겠지만 조심하십시오.”

   “하하! 그럼요. 천호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답한 도씨가 유단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체중을 실었다.

   유단은 눌린 어깨가 무거웠지만 사실대로 얘기하면 또 놀림거리를 줄 것 같아 인상을 쓰며 견뎠다.

   “에구구, 네 녀석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왔으면 대신 시키는 건데. 그럼 천호님 걱정도 덜었을 텐데.”

   도씨의 투덜거림에 살짝 흥미가 일었다. 유단이 경험해 본 양조라고는 심보 고약한 신들과 만들었던 동방삭의 술과 도씨가 만들어 둔 뱀술에 뱀을 넣어준 것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후자는 양조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술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래도 오늘은 빨리 온 편 아닌가?”

   유단이 은근하게 물었지만 도씨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쉬우랴? 이제 두 시가 다 되어가는 구만. 빠르긴 무슨. 더 빨리 왔어야지.”

   유단은 도씨의 질책에 어이가 없어졌다. 시간 개념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집에도 들리지 않고 왔는데 얼마나 더 빠르게 오라는 소리야? 학교 째고 술 빚으러 가는 고등학생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어?”

   유단의 말에 도씨가 화들짝 놀라며 유단의 어깨에서 늘어졌던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어깨가 홀가분해졌다. 

   “학교를 째? 잠깐 오늘이 며칠이지? 일찌감치 보이길래 주말인 줄 알았더니만. 그러고 보니 너 중간고사 있다지 않았냐?”

   몸을 움찔하자 옆에서 백란이 바보를 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는 나머지 아무 말이나 했더니 바라지 않는 쪽으로 얘기가 흘렀다. 당황한 유단이 우물쭈물하자 모두의 눈이 측은해졌다.

   채설의 유단의 팔을 토닥이며 말했다.

   “시험 좀 못 본다고 해도 괜찮아. 우리는 시험을 못 치는 유단이도 사랑해. 알지?”

   “그럼요. 다음에 잘 보면 되죠.”

   “그렇게 오냐오냐해서 이 지경까지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2학년이니 신경써야할 때입니다. 아니. 오히려 늦었습니다.”

   “그렇지. 지금이라도 양궁을 해보는 건…….”

   놀림인지 위로인지 헷갈리는 말들을 듣고 있다가 도씨의 말에 유단은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아직도 포기 못한 거야? 내가 어떻게 양궁으로 대학을 가?”

   그놈의 양궁. 도씨는 기회만 나면 저 얘기를 했는데 유단과 흑요가 아무리 가능성 없는 얘기라고 해도 포기를 몰랐다. 

   딱 한 번 성공한 거 가지고 양궁으로 대학을 가라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아주 국가대표에 선발돼서 금메달도 따오라고 하지.

   그런 유단의 마음을 모르는 실컷 하하호호 하던 도씨는 생각난 게 있다는 듯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바닥에 늘어진 그림자를 보더니 화득 정신을 차리듯 고개를 휘저었다.

   “이크, 지금 시간이 몇 시지? 누룩 만들던 것을 그대로 두고 왔는데. 이만 가보겠습니다, 천호님.”

   “그러십시오.”

   “너희도 힘내거라. 내가 먼저 끝나면 도와주러 오마.”

   백란의 허락에 도씨가 인사를 남긴 채 떠나갔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처럼 갑자기 떠난 도씨의 모습에 다들 눈만 깜빡였다.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그러게. 술이 그렇게 좋은가?”

   “유단이도 어른이 되면 좋아질지도 몰라.”

   “그래도 저만큼은 아닐 것 같은데?”

   시시콜콜한 잡담을 하고 있으려니 덩그러니 있는 백란이 신경 쓰였는지 채설이 물었다.

   “그런데 이제 둘은 뭐할 거야?”

   그제야 기다렸다는 듯이 백란이 말했다.

   “사실 두 분이서 하기엔 양이 많은 듯 싶어 모자란 일꾼이라도 하나 데려다둘 겸 함께 온 거였는데요.”

   그 말에 유단이 발끈했다.

   “잠깐. 금시초문인데. 그 모자란 일꾼이라는 게 나야?”

   “그럼 뭐 하러 발 아프고 입 아프게 데려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설마하니 지금 두 분을 도와주기 싫어서 그러십니까?”

   백란이 사이코패스를 보는 듯한 눈으로 유단을 봤다. 

   “뭐? 그럴 리가!”

   유단은 기가 찼다.

   백란의 도발은 효과적이었다. 알면서도 걸려들 수밖에 없었다. 

   발끈한 유단이 쌍둥이에게 물었다. 

   “도와달라고? 내가 뭐 하면 돼? 저거 심으면 돼?”

   둘의 대치를 보고 있던 채설이 어딘가 난감하다는 듯 대답했다.  

   “유단이가 도와준다면 정말 기쁘겠지만, 사실 아까 웬만한 건 다 해서 이제 유단이가 할 만한 게 없어. 식물들이 예민해서 뿌리가 조금만 상해도 비명을 지르거든.”

   할 게 없어? 귀찮은 일 줄었다 싶으면서도 묘하게 힘이 빠졌다.

   유단이 힘이 잔뜩 들어갔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날도 좋으니 두 분이서 휴식을 즐기는 건 어떠세요? 달콤한 간식이랑 차도 한 잔 하면서요.”

   채우는 웃으며 말했지만 유단은 알았다.

   이건 쓸모 없으니 비켜 달라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

   

   둘이서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채우의 권유처럼 둘은 풀벌레가 울고 바깥이 보이는 마당에 앉아 백란이 탄 백차에 손님이 주고 간 오색 떡을 곁들여 먹었다. 고급 제과점이나 떡집에서 팔 법한 꽃모양의 꿀이 잔뜩 든 꿀떡이었다. 고급 참기름에 바른 떡이 구슬처럼 반질반질했다.

   떡을 우물거리면서 먹던 유단이 물었다.

   “그런데 너도 뭔가 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백란은 그 사이에 서책 하나를 가져와 펼쳐선 보고 있었다.

   안 듣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대로 듣고는 있었는지 바로 대답이 날아왔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원래 그렇게 마당에 나와 있는 타입이 아니잖아?”

   백란은 유단을 힐끗 쳐다봤다. 

   유단은 저 시선의 뜻이 눈치 좀 늘었다? 인 것을 알았다. 금방 우쭐해졌다.

   다시 팔락. 읽고 있던 책을 넘긴 백란이 대답했다.

   “용케 그런 점을 눈치 채셨습니다. 모두 바쁜 와중에 저만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리가 없지요. 저는 종이를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종이?”

   “네. 대나무로 만든 종이입니다. 망종에만 만들 수 있는 종이이기 때문에 이 날에는 꼭 그걸 합니다.”

   “그럼 바쁜 거 아니야?”

   바쁜 것치고는 엄청 한가해 보이는데. 보지도 않고 미심쩍은 표정을 느낀 건지 유단을 한심하게 쳐다본 백란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 종이는 당장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할 일은 끝났으니까요. 그 종이는 망종에 벤 어린 대나무를 백일 간 연못에 담가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남은 일은 백일을 기다려야만 진행 할 수 있습니다. 대나무는 이미 아침 일찍이 베어서 연못 안에 담구고 왔지요.”

   생각보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보다 저 여우가 스스로 일찍 일어나서 꼭두새벽부터 나무를 베었다는 사실에 유단이 깜짝 놀라 외쳤다.

   “그걸 매년 직접 한다고? 게다가 일찍 일어날 줄도 알았단 말이야?”

   “무례하시군요. 저도 일찍 일어나야할 때는 일어납니다. 사서 쓰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직접 만든 종이를 쓰는 것은 꽤 운치 있는 일이니까요. 어렵게 만드는 만큼 품질 또한 보장되기도 하고요. 요즘 말로는 홈메이드라고 하던가요?”

   “대단하네. 종이 만드는 거 엄청 힘들 것 같은데.”

   유단의 말에 곧바로 여우가 으스댔다.

   “말씀대로 종이를 만드는 건 무척이나 고되고 어려운 일입니다. 물론 저 혼자 하는 것은 아니고 백일 후 종이를 만들 준비가 끝나면 유명한 지장紙匠께서 오실 예정이죠. 매년 종이 만드는 것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장사도 겸하고 있어 그 날 만든 것을 조금 드리는 대신 그분께서 직접 만든 종이와 교환하기도 하죠. 올해는 또 어떤 종이가 있을지 벌써부터 그날이 기대되는 군요.”

   하긴 저 여우가 쓰는 종이가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종이일 리가 없었다. 그놈의 수집욕을 생각하면 특이하거나 귀하고 좋은 종이면 모으고 볼 게 틀림없었다. 백란이 생각보다 바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온 물음이었지만 임 할 일을 끝낸 상태라니 거리낄 게 없었다.

   하여간 지금 할 게 없는 건 맞다는 소리잖아?

   “그런데 나 그냥 놀러 온 건 아니었거든.”

   백란이 타온 차 한 모금을 마신 유단이 말했다.

   뜬금없는 말에 백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뭘 주워 오신 겁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땅만 쳐다보면서 이상한 걸 줍고 다니는 것 같잖아.”

   “아니었습니까?”

   “아니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뭡니까. 빨리 내놓아보십시오.”

   대꾸할 말도 못 찾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에 감싼 것을 꺼내놓자 반지르르한 원목 탁자에 그것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탁자 끄트머리에서 톡. 멈춘 것의 위에 두 인요분의 시선이 머물렀다.

   “구슬이군요.”

   “구슬이지.”

   유단이 떨떠름하게 답하자 백란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황당하다는 듯 이러고도 매번 이상한 걸 주워오는 게 아니라고? 같은 표정으로 보니 유단으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이게 무슨 구슬인 겁니까?”

   “그걸 모르니까 가지고 왔지. 내가 본 건 액구슬 밖에 없는데 어떻게 알겠어?”

   “참 잘나셨습니다. 그 액구슬도 주워 본 사람이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뭔지도 모르는 걸 덥석덥석 주워 온 답니까? 바보가 아니고서야.”

   백란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유단도 어쩔 수 없었다. 얼핏 봐도 어린애들이 줍기 좋게 생긴 물건이었던 데다가 예사 물건이 아닌 것은 유단이 가장 잘 알았다. 보기만 해도 왼쪽 눈이 반응하는 것을 보면 그것의 주인이나 물건이나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평범한 사람이 줍는 쪽보다 유단이 줍는 게 나았다.

   “그럼 바닥에 떨어져있는 걸 그냥 둬?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내가 줍는 게 낫지.”

   그런 의미에서 항변했지만 백란은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를 보는 듯한 눈으로 입술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면서 그랬다는 것에 혼을 내야할지, 기특해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슬쩍 눈치를 보던 유단이 말했다.

   “그래서 너도 모르는 거야?”

   “세상에 구슬과 연관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뭣 모를 구슬 하나 던져 놓는다하여 한 눈에 그것의 내력을 안답니까?”

   “그런가? 너라면 알 줄 알았는데.”

   “어떤 이야기에서든 구슬의 생김새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것, 어느 이야기에서 기반 된 건지가 중요한 것이죠. 일단 생김새를 봐서는 제가 아는 구슬은 아닌 듯 싶군요.”

   “주울 땐 그렇게 위험해보이지는 않았는데.”

   솔직히 지금 봐서도 그렇게 위험해보이지 않았다. 액구슬은 줍자마자 뭔가 잘못됐다는 게 느껴졌는데, 유단이 느끼기에 이 구슬은 오히려 악한 기운보다 상서로운 쪽에 가까워 보였다. 아주 미미했지만.

   한 손으로 잡고 들어 올려서 이리저리 살펴보던 여우가 다시 탁자에 구슬을 내려놓았다.

   “예. 확실히 여의주나 여우구슬은 아니군요.”

   “본 적이 있나 봐?”

   “아주 옛날에요. 용의 여의주는 투명해보일 정도로 예쁜 물빛 색이었고, 여우구슬은 진주처럼 우윳빛깔의 불투명한 구슬이었습니다. 전자가 무취나 청량감이 느껴진 반면 후자 쪽은 인위적으로 만든 향수처럼 달콤한 향취가 났었죠. 확실히 요사스러운 기운이 느껴져 참 껄끄러운 구슬이라고 생각했었던 게 기억에 남는군요.”

   둘 다 쉽게 볼만한 물건은 아닐 것 같은데 저 여우가 그걸 어떻게 봤을지는 제쳐두고서라도 여우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그 둘은 아니라는 걸 알겠다. 그럼 이건 대체 뭐하는 구슬이지?

   유단이 주워 온 구슬은 유리처럼 투명했고, 어떤 향취도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색무취의 구슬이었다. 유단이 느끼기에 상서로운 기운이 아주 미약하게 느껴지는 것 빼고는 평범한 유리구슬과 다를 바 없어보였지만, 햇빛에 비추면 묘하게 자개처럼 오색 빛이 도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애매했다는 뜻이다. 천안이 반응했으니 분명 보통 물건은 아닐 텐데.

   “들고 다닌다고 해서 딱히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닌 것 같으니 천천히 알아봐도 되겠죠. 주인이 있는 물건인지 아닌지도, 들고 다니다 보면 아는 이가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빈 함 안에 넣어두고 흔들면서 소리나 듣는 거죠.”

   “그게 뭐야? 너 옛날에 그러고 놀았어?”

   유단이 황당하다는 듯 묻자 백란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쁘지 않으니 한 번 해보십시오.”

   “진짠 거야, 아닌 거야?”

   “글쎄요, 어느 쪽 일까요?”

   백란이 가느스름하게 미소 지었다. 실로 여우다운 미소였다.

   저 여우는 농담도 진심처럼 말해서 도저히 뭐가 진담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방금 말은 놀린 게 맞는 것 같았다. 유단이 투덜거렸다.

   “넌 농담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해.”

   “다 그쪽한테 배운 겁니다. 탓하려거든 본인을 탓하십시오.”

   유단은 기가 차서 말도 하지 못했다. 여우요괴 아니랄까봐 말 한 마디 안지지. 애초에 그건 무효 아닌가? 

   유단은 깨달았다. 여기 있으면 다른 이들이 올 때까지 계속 여우의 놀림거리나 될 것이다.

   유단은 백란이 준 백차를 한 번에 들이키고는 탁자에 탁하고 내려놓았다. 그대로 몸을 일으켜 백란을 휙 보았다. 백란의 눈썹이 들썩였다가 평온해졌다.

   “어디 가십니까?”

   “일 하러.”

   *

   

   첨벙. 

   유단은 현재 연못에서 낚시를 하는 중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나름대로 긴 사정이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일꾼을 자처한 것은 좋았으나, 유단을 쓰려는 요괴가 없었다. 동자삼 쌍둥이들에겐 이미 쓸 데가 없다며 거절당했고, 그나마 유단이 궁금해 했던 도씨의 누룩 빚기는 만드는 방에 들어가기조차 못했다. 도씨는 일찍 왔어야했다며 질책했던 것은 다 잊은 듯이 이런 걸 미성년자에게 시키면 큰일 난다며 유단의 등을 떠밀었다. 남는 것은 구렁이요괴밖에 없었다.

   그리고 까만 가마솥이 광나도록 닦은 흑요는 방해하지 말고 이 어항에 담을 물고기나 잡아오라며 유단을 내쫓았다. 

   이게 유단이 낚시를 하게 된 이유였다.

   연못에 가는 길에 지나가는 요괴들에게 주머니에 넣어둔 구슬을 내보이며 이게 뭔지 아냐고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부분 구슬치기? 아직 어린 아이네. 같은 흐뭇한 눈으로 봐서 유단을 열 받게 했지만 말이다.

   유단은 흑요가 알려준 방식으로 돌길의 돌을 밟으며 반월당에 자신이 모르는 장소가 얼마나 더 있을지 궁금해 했다. 

   정원에서 돌길을 걸을 때 처음 한 번은 바닥을, 두 번째는 돌만 연달아 두 번 밟고, 마지막으로 딛은 돌에서 하나를 건너뛰고 있는 돌을 밟으면 연못이 보인다.

   맑은 옥빛의 물을 띄고 있는 연못은 안에서 나무가 자란 것처럼 가지 같은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아름다웠지만 유단이 보기에 좋게 말하면 운치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귀신 나올 것 같았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새소리나 들으면서 졸음을 견디고 있자 파스스. 나뭇잎이 인위적으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조금 전까지 봤던 여우였다.

   “보면 몰라? 낚시하잖아.”

   “일 하러 가신다더니.”

   백란의 말에 유단이 울컥해서 말했다.

   “일 하는 중이거든? 여기만 사는 물고기를 낚아오라는데 어떡해? 그러는 너는? 설마 여기까지 구박하러 따라온 건 아니겠지?” 

   “그렇겠습니까? 새벽에 베어서 넣어둔 대나무가 잘 있는지 확인하러 왔더니만 웬 바보가 하나 있어서 놀란 것은 접니다. 정말 곤란하게 됐군요.”

   “뭐? 어디에 뭘 넣어?”

   연못 안에서 자라난 나무처럼 보였던 저게 설마 저 여우가 아침에 잘라 넣었다는 대나무인 건가? 자세히 보니 대나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 여기 사는 물고기들은? 

   “여기 물고기 살아는 있는 거야?”

   무리하지 말라고 하는 걸 잡아오겠다고 구렁이한테 호언장담했는데!

   유단이 경악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여우가 유단이 가져온 낚시도구를 이리저리 들었다 놓으면서 말했다.

   “천호쯤 되면 물고기를 죽이지 않고도 연못에 대나무를 넣을 수 있는 법입니다.”

   관심없는 것처럼 말했지만 목소리에 묘하게 자랑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재수 없었다. 하지만 유단은 지금 관대한 기분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어쨌거나 연못 생태계가 파괴된 건 아니란 말 아닌가?

   물고기가 죽은 게 아니라면 됐다. 

   유단은 순식간에 마음에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 대단하네.”

   “말에 영혼이 없는데요. 좀 더 대단히 여기십시오.”

   유단이 대충 대꾸하자 여우가 투덜거렸다.

   

   그 이후 계속 낚시만 했다. 유단은 스스로 자신이 환경미화원인가? 싶을 정도로 이상한 것만 낚았는데 쓰레기 아니면 요괴였다. 물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유단의 모습을 구경하던 백란은 그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질렸는지 유단이 주운 유리구슬을 빛에 비춰보며 딴청을 부렸다.

   그 순간이었다. 어. 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더니 첨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단은 하품을 하려다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한 손으로는 흘러내리는 소매를 붙잡고 한 손은 연못에 집어넣은 백란이 보였다.

   “갑자기 왜 그래? 연못에 손은 왜 넣은 거야?” 

   백란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구슬의 정체를 알아낸 것 같습니다.”

   “뭐?”

   딴청이나 피우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알아냈다고? 어떻게? 

   갑자기 이상한 짓을 벌인 것 치고는 평화로운 목소리로 백란이 말했다.

   “이것을 보십시오.”

   유단은 의자 삼았던 바위에서 일어나 연못에 잠긴 백란의 손을 목을 빼어 보았다. 물결 아래 백란의 흰 손 안에서 오로라처럼 다양한 빛깔의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기이잉. 왼쪽 눈이 뜨거웠다. 저 구슬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감각이었다. 눈에 힘을 주니 까맣게 물고기 형상이 헤엄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같았다. 저게 뭐지?

   “그 구슬이야?”

   백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방리득보설화放鯉得寶說話의 구슬입니다.

   “방리…뭐?”

   “방리득보설화요. 잡은 잉어를 놓아주어 득을 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대체 뭔 소리지? 은혜 갚은 까치 같은 건가? 백란의 말을 들어보니 아까 본 것은 잉어였던 것 같았다.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유단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눈치 챈 백란이 입을 떼었다.

   “잉어의 보은이라고도 불리는 설화입니다.”

   “무슨 내용인데?”

   “한 어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잉어를 잡았으나 성정이 모질지 못하여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잉어의 눈을 보고는 도로 놓아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잉어가 실은 용왕의 아들이었던 겁니다. 감사의 의미로 용궁에 초대 받은 어부가 용왕에게 보물을 얻게 되어 큰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흥부와 놀부 같은 응보담應報譚으로, 착한 일을 하면 그만큼 보답이 돌아온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대충 유단이 이해한 것처럼 은혜 갚은 까치 같은 얘기가 맞았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이게 그거라고?”

   유단은 손 안에 든 구슬을 내려다보았다. 큰 부자가 됐다면 대단한 구슬 같은데 기린몽 때와 달리 유단은 그 구슬을 주운 후 어떤 행운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충 범상치 않은 물건 같긴 했어도 그렇게 대단한 물건은 아닌 줄 알았는데.

   “제가 생각한 게 맞다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건 주우면 부자가 되는 구슬이라며. 난 그대로인데?”

   유단이 지갑을 확인해봤지만 구슬을 줍기 전 그대로였다. 전처럼 대뜸 돈다발을 주고 가는 사람도 없었다.

   백란이 정정했다.

   “정확히는 소원을 이루어 주는 구슬입니다. 이야기에서 어부가 부자가 된 것은 그가 빈 소원이 부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겠죠.”

   유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더 대단한 거 아니야? 나도 소원도 빌면 들어줘?”

   기대에 찬 유단과 다르게 백란의 반응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글쎄요. 한 때는 용왕의 보배로서 소원을 들어주는 구슬이었지만, 사람들 틈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람이 무심코 빈 소원을 들어주다보니 제 기능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제가 그만한 물건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용왕의 구슬은 오색 빛을 발하며 바다의 어떤 보석보다 아름답다 했었는데…, 이해는 합니다. 무려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대단한 힘이 영구적일 리는 없었겠죠. 이리 볼품없는 모습이 된 걸 보면.”

   “그게 뭐야. 결국 그냥 평범한 유리구슬이란 소리잖아.”

   유단이 허탈하게 말했다. 그럼 그렇지. 그런 기회가 쉽게 올 리가 없었다. 좋은 걸 주웠는데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조금 아쉬웠지만 구슬의 소재지를 알고 보니 홀가분한 감이 없지 않았다. 

   원주인이 용왕이라면 그 희미하게 느껴지는 상서로운 기운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용왕의 구슬치고는 너무 쓸모없지 않나?

   소원도 못 이뤄 줘. 부자도 못 돼. 그런데 그냥 구슬도 아니라서 방치 할 수도 없었다.

   “그럼 이제 이건 어떡해? 용왕한테 돌려줘야하나?”

   유단이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자기 물건이 이런데 굴러다니는 줄 알고 있으면 유단이 용왕이어도 화가 날 것 같았다. 물론 한 번 인간에게 주긴 했지만. 

   유단의 말에 곰곰 생각하는 것처럼 구슬을 쳐다보던 백란이 말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빌어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뭘 빌어?”

   “소원 말입니다. 이 구슬은 드물게도 어떤 대가도 받지 않으니까요. 소원을 빌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면 힘이 다한 구슬이니 장식용으로 쓰면 될 것이고, 들어준다면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니 감사할 일이죠.”

   백란의 시선이 유단을 향했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소원권이 생기긴 했는데 들어줄지 들어주지 않을지 모른다고 하면 누구든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그런데 내가 빌어도 되는 거야? 딱히 생각나는 소원이 없는데.”

   백란은 연못에서 손을 빼 젖은 손을 털며 말했다.

   “그건 모를 일이죠.”

   “뭐?”

   유단의 질문에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백란은 연못에서 나오자 순식간에 빛을 잃고 건조하게 마른 구슬을 원래 들어있던 주머니에 잘 넣어 유단에게 건네주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세상에 우연이라는 건 없습니다. 특히나 이런 것은, 간절히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나타나도록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것을 주운 자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는 것이겠죠. 오늘 집에 가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분명 지금은 몰라도 원하는 바가 있을 테니.”

   그런 걸까….

   그날은 결국 흑요가 말한 물고기를 잡지 못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유단을 본 흑요는 어떤 구박도 없이 쯧. 하고 혀 한번 찼을 뿐 밥 먹을 테니 준비하라는 말만 했다.

   저녁은 햇보리가 들어간 밥과 계란말이, 김치찌개가 있었다.

   

   * 

   

   늦은 시간 집으로 와서 씻고 난 유단은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여우는 그에게 소원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유단이 생각하기에는 자신에게 그럴싸한 소원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옛날에는 천안이 없기를 바랐었고,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을 바랐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천안이 있었기에 모두와 만날 수 있었다.

   유단은 지금 생활이 썩 마음에 들었다. 부자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 간절하지도 않았고 그냥 반월당의 밀린 집세나 공과금 같은 걸 걱정 없이 낼 수 있겠다 정도의 마음이었다. 기껏해야 떠오르는 소원이라고는 이번 친 중간고사 점수가 생각보다 좋기를 바라는 정도일까.

   솔직히 그 정도면 되지 않을끼?

   머리가 덜 말랐지만 귀찮음에 그냥 침대에 누워버린 유단은 구슬이 든 주머니를 머리 옆에서 굴려보았다.

   그 여우도 그러지 않았던가. 이루어지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그냥 장신구로 쓰면 된다고. 유단은 이 미미한 기운을 가진 물건이 그렇게 대단한 힘을 낼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니 정말 이루고 싶은 소원을 들어줄 힘은 없을 것이다.

   일어나서 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유단은 중간고사 점수가 제 생각보다 좋게 해주세요. 라는 소원을 빌면서도 머리 한 구석으로 생각했다.

   

   사실 정말 바란 소원은 따로 있었다. 소원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이루어지지 못할 거라면 처음부터 없는 셈 치는 게 나을 테니까. 없다고 생각했다.

   신거무 장터에서 과분하게 엄마를 봤으면서도 또 엄마를 보고 싶어하는 건 유단이 생각했을 때도 너무 몰염치한 것 같았으니까.

   둘이서 오붓하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유단이 바란 것은 그만큼 대단한 일에 들지 못했다. 마지막 작별인사는 그때 했으니까. 더 미련을 가지면 안 되니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에게, 죽은 사람은 산 사람에게 미련 가져봤자 좋지 못하니까. 유단이 바란 것은 하나였다.

   그 피 묻은 눈밭의 열차 안이 아니라, 엄마 몸을 꿰뚫은 쇠꼬챙이 따위가 아니라, 얼른 가라고 외치는 슬픈 얼굴 아니라. 

   그 일이 있기 전. 엄마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싶었다.

   화분에 핀 꽃에 함께 물을 주고, 밖에 나가기 전에 함께 선크림을 바르며,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함께 물장구도 치던 그 모습으로. 

   더 이상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그리워져도, 고통스러운 이별이 아니라 그 기억으로 덧대어 살아가고 싶었다.

   본인조차 잘 알지 못할 정도로 가슴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소원에 구슬이 반응했다. 

   잠든 유단의 뺨 위로 찬란한 오색 빛이 아침 윤슬처럼 은은하게 물결쳤다.

   그리고.

   소원은 이루어졌다.

   

   *

   

   유단의 반에는 성적을 나눠주기 전 시험 점수를 확인시켜주는 시간이 있었다. 교탁 앞에 불려나간 유단은 점수를 확인했다. 

   유단이 시험 당일 생각했던 것처럼 시험점수는 처참했다. 오히려 가채점했던 점수보다도 낮은 것을 보면 마킹을 잘못한 것 같았다.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하자. 담임의 응원인지 위로인지를 들으며 유단은 대충 대답하면서 종이에 이름을 적고 자리로 갔다.

   주변에서 이번 성적과 시험에 대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유단은 책상에 엎드린 채 파란 창가를 힐끗 보았다.

   잠들기 전 시험 점수가 생각보다 괜찮기를 빌었던 소원처럼 유단이 고른 정답이 시험 오류로 중복정답처리가 된다거나 하는 뜻밖에 행운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단의 점수는 처참했고 회생이 불가능했다.

   방금 본 담임의 표정은 시일 내에 이 파멸적인 성적에 대해 개인면담을 신청할 생각인 것 같았다. 내신이고 대학이고 산더미 같은 문제가 남아있었지만 유단은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우울하다거나, 낙담했거나, 그런 것 없이.

   정말 괜찮았다.

   *

   

   학교를 마치고 반월당에 왔다. 

   고즈넉한 한옥은 노을이 비추어 붉고 노란 빛이 감돌았다. 대문을 넘고 복도를 지나는데도 벌써 저녁 드라마 할 시간인지 모두 보이지 않았다. 

   여우만이 늘 있는 그 자리에서 유단을 반겼다. 

   백란은 여전히 그곳의 주인인 것처럼 유단에게 차를 내주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이제 손님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는 듯 상석을 비웠다. 이상한 방식이었다.

   차는 유단이 자주 마시는 옥수수차였다. 따뜻한 김이 콧속을 적신다. 혀에 달콤한 차가 닿고, 백란이 말했다. 

   “소원은 이루어지셨습니까?”

   묘하게 다정한 어투였다. 유단이 느끼기에 그 말투가 어린 아이를 대하는 것 같았다. 유단은 혀를 타고 넘어온 차를 꿀꺽 삼켰다.

   무어라 대답을 하려는데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말엔 긍정을 해야 하는 걸까, 부정을 해야 하는 걸까?

   잠들기 전 빈 소원이 이루어진 건 아니었지만, 무언가 이루어지긴 하였다고? 

   유단은 백란에게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꿈에서 엄마를 봤어. 내 기억과 달리 행복해보였어.’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아니었는데.

   유단이 입을 다물어 정적만 흘렀지만 백란은 침묵 속에서도 답을 들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그랬군요.”

   그 말을 들으니 유단은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슬퍼서 나는 눈물이 아니었다. 이해받은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백란은 더 이상 소원에 대해 묻지 않았다.

   유단은 더 이상 쓸모를 잃어버리고 약간의 상서로운 기운도 없이 투명한 유리구슬이 되어버린 구슬을 백란에게 넘겼다. 그 구슬을 바라보던 백란은 나중에 쓸 데가 있을지도 모른다며 구석에 나온 육각형 함에 구슬을 잘 넣어두었다.

   어쩐지 가슴 속이 후련했다. 답답한지도 몰랐던 부분이 녹아 없어진 것 같았다. 유단은 가슴과 배 사이를 손으로 쓸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도 모두 휘발 되어 사라진 것 같았다. 이제

    괜찮았다.

   정말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망쳐버린 시험은 어쩔 수 없다. 다음 시험을 잘 보면 된다. 

   어쩔 수 없는 이별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괴롭고 그리워도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유단은 더 이상 슬픔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동자삼 쌍둥이가 준 씨앗에서 꽃이 피면 그땐. 예쁜 눈꽃이 피는 그 날엔.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갈 것이다.

   이제는 나도 괜찮다고, 알려주기 위해.

   그건 유단이 가장 잘 하는 일이었다.

후기

안녕하세요, 하하하입니다.

타인의 것을 얻기 위해 제 것을 내주어야만 하는 이것이 바로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다인 걸까요? 7디페 때 모든 기력을 그때 끌어 쓴 탓인지 이번 합작에 제출할 원고를 적는데 많은 애를 들였네요. 정말 기간이 간당간당할 때까지 원고를 받지 못하셔서 애가 타셨을 주최자님께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좋은 기회를 개최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ㅜㅜ

합작에 참여하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이번 합작에 낸 글은 제목을 어떻게 지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던 것 같아요. 전체적인 주제는 망종에 일어난 일이지만, 유단이의 어머니를 향한 감정과 그리움을 건강하게 해소하는 ‘성장’에 대해 나타내는 제목을 짓고 싶었기에 亡終(일의 마지막)과 芒種(절기)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결국 둘 다 포기를 못해서 제목은 그냥 망종이 되었네요. 한글은 정말 위대해요.

그리고 흑요가 나오는 부분도 길게 쓰고 싶었는데 더 이상은 안 돼....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급하게 마무리해서 아쉽네요. 흑요님 사랑합니다♥

이 글이 보여 질 때쯤엔 저도 합작에 참여하신 분들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되는 거겠죠. 정말 기대가 됩니다. 다른 작품에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했다는 사실만 알아주세요...

햇보리를 다 베어내고 모내기를 해야 하는 망종처럼. 유단이가 아픈 기억은 묻고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을 남긴 채 건강히 어떤 그리움을 표현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마지막으로 합작에 내려다가 불가피한 이유로 버려졌던 7개의 소재와 그걸 견디고 결국 마감을 해낸 저에게 치얼스 하겠습니다. 하하하! 부디 즐거운 반월당 되세요 :D

<반월당의 기묘한 이야기> NCP 팬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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